posted by jogaq 2020. 2. 14. 06:20

최초작성: 2019. 2. 7. 16:21

 

술을 섞고 삶을 바꿔줄 시간이군

 

 눈이 살짝 아프고 침침합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데 쓰이는 관찰 플레이트 있죠, 정확하게 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리 파레트였나?) 그걸 눈 앞에 서너장씩 겹쳐서 들이대놓은 것 같습니다. 겹쳐진 중간이 살짝 더러운 상태로요. (안경에 실금이 갔었다. 19년 중순에 알을 바꿨다.-20)

 PC-98시절 아트좀 찾아보려고 모니터에 얼굴을 가져다댔기 때문일 겁니다. 이 시절 그래픽은 굉장히 치밀한 계산의 산물이었죠. 컴퓨터 계산인지 사람이 모눈종이에 일일히 찍어가며 만들었던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98이라는 명칭 때문에 조금 헷갈렸었는데, 검색해보니 무려 82년부터 PC-98**~이라는 넘버링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식이 늘었습니다.

 아무튼 16색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온갖 착시 미술, 컴퓨터 기술 역량이 동원되어 굉장히 그럴듯한 그림들이 나왔습니다. 지금 보면 무슨 수준 높은 미술 기법 같습니다. 당시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 (이하 발할라)의 개발사 스케반 게임즈는 인터뷰를 통해 PC-98 시절의 게임아트 (콕 집어서는 Policenauts)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출시 예정인 후속작 N1RV Ann-A에서 더 뚜렷한 레트로 그래픽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최소한 출시된 이후에 하는 게 낫겠습니다.

 

 스케반 게임즈는 베네수엘라 연고의 2+인 개발사입니다. 일본어에도 능통한 십덕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2014년 경 사이버펑크 주제의 게임 잼에 발할라의 모태 격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것을 보완/수정하여 16년에 발할라를 정식으로 출시했습니다.

 출시 이전에도 관심이 가던 게임이었는데, 막상 출시 후 곧바로 플레이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생각은 나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 제쳐두고. 1년 뒤 17년에 공짜로 받아서 해 보게 되었습니다. 자랑입니다. 팬아트라고 보기는 뭣하지만, 여튼 분류상으로는 팬아트인 그림을 그려서 플겜아조씨한테 드렸더니, 답례격이라고 제 찜목록에 있던 이 게임을 주셨습니다. 직장인은 최고야.

 비주얼 노벨은 게임일까요? 새삼 이런 질문도 식상하지만, 서구 양반들은 이 장르를 게임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쪽 동네에서는 어드벤쳐 게임이 조금 더 롱런했었죠. 게임 북이라는 것도 있었고. 여긴 없었냐 하면 또 그건 아니지만.

 플레이어가 직업 캐릭터를 움직이거나, 퍼즐 조각을 움직이거나 하는, 구체적인 '플레이'가 없으면 조금 애매하다는 반응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부분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텍스트 박스를 넘기고 떡신을 보는 것 보다는, 그래도 캐릭터가 움직이면서 총이라도 쏴 주는 것이 '게임'스럽긴 하죠.

 저는 딱히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주얼 노벨을 두고 게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딱히 거부감은 없습니다. 게임이 별 것도 아니고. 그래도 페이트 시리즈가 문학의 범주에 속한다는 주장에는 절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긴 합니다. 네 뭐 어떻게 본다면 뭐.. 문학의 정의를 확대해석해야 하긴 하겠지만요. 탕 속의 고기 주제에. 암튼, 비주얼 노벨에 대한 경험의 토대가 얇기 때문에 두서없이 작성합니다.

 

태양샘인가보다.

 

 발할라는 207X년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정부가 기업의 파워에 밀려난 상황의 글리치- 시티라는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두고 있습니다. 더 좁게는 도시 한 구석의 BTC 등록번호 VA-11 Hall-A라는 바가 배경입니다. 우리 주인공은 바텐더 질입니다.

 

 많은 비주얼 노벨은 플레이어가 대화문에서 어떤 대답을 선택하느냐에 다라 스토리 분기가 갈립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카마이타치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아키타입과 발할라의 차이에 유념

 우선 발할라는 주인공이 굵직한 사건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 주인공 질은 바텐더로서, 이 디스토피아 글리치 시티의 여러 주민들을 상대합니다. 이 구성은 저를 제3자, 관찰자로 밀어넣습니다. 방관자의 방관자라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글리치 시티의 여러 인물들은 크고 작은 일들에 휘말리긴 하지만,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얼마 없습니다.

 

 발할라에서 스토리의 이정표는 대화문에서의 선택지가 아닌, 제공하는 술에 의해 달라집니다. 바에서 손님들을 얼마나 취하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술을 내놓느냐에 따라 게임의 대화문이, 질과 손님의 관계 상황이 조금씩 바뀝니다. 스토리적으로 사실 큰 갈래 같은 것은 없다시피 하지만. 사실 술 하나 잘못 줬다고 누가 죽고 안죽고 이러는 것도 과한 일 아닙니까?

 

 이런 디자인이 그래도 대화문 넘기는 것보단 게임다운 구석이 있죠. 그리고 플레이어가 좀 더 게임에 몰입할 수 있게끔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주인공에게 빠져들게 해 준다기 보다는, 관성적으로 대화문을 넘기다가 게임에 다시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주의 환기 장치 같습니다.

 단순한 디자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단점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액션이 너무 단순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한 반면, 귀찮지 않은 선에서 사고를 새롭게 해주는 간단한 윤활제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조금 더 복잡했다면 어땠을까요?

 

창문 너머의 저 하얀색이 뭔가 했었는데, 맞은편 건물 창문 불빛인 것 같다.

 

사전에서 조합법을 찾아 제조한다. 익숙해지면 안 봐도 된다.

 

 이건 결국 무게중심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텐더 액션이 리프레셔에 지나지 않는다면, 복잡한 시스템은 몰입감 형성에 방해가 될 것이고, 바텐더 액션이 조금 더 깊이있기를 바란다면, 글쎄요, 중간중간 스토리가 조금 더 끊기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요? 어려운 문제 같긴 하지만, 발할라가 지향하는 정체성이 무었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전체 플레이 시간에서 스토리/텍스트의 비중은 바텐더 액션과 반비례합니다. 하지만 바텐더 액션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조금만 더 깊이 있었다면? 웹진(서양)에서는 발할라의 단점을 꼽을 때 반복적인 바텐더 액션을 짚습니다. 조금 더 '게임' 답기를 원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괜찮습니다. 텍스트가 좋거든요. 텍스트가 좋은만큼 바텐더 액션이 단순해도 전혀 문제 없습니다. 텍스트- 스토리가 구렸으면 바텐더 액션이라도 좋았어야 했겠지만, 발할라는 문제 없습니다.

 앞서 적어두었듯, 게임은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서, 주인공을 대화에 직/간접적으로 참여시킵니다.바텐더 앞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손님들은 평소에는 꺼내놓지 않을 만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캐릭터 설정이 우수수 쏟아져나오는데, 게임 특성상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주인공은 글리치 시티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은 역시 흥미롭습니다. 골목 뒷편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나, 도시가 감추고 있는 은밀한 것들, 제작진이 그리는 글리치 시티의 설정을 천천히 깔끔하게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게임의 캐릭터들 역시 매력적으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각각의 사연과 개성에 공이 들어갔습니다.

누나 오늘 개쩔어요!

 

 발할라의 도트 그래픽은 준수한 편입니다. 디테일이 아쉬운 부분도 종종 보이지만, 거슬리는 부분은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캐릭터 그래픽인데, 고해상도 디지털 아트를 도트 그래픽으로 줄여 디더링을 먹인 것 같습니다. 이후 전반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습니다. 도트 갤러리에서라면 가짜 도트라며 싫어했을 법도 하지만, 개발자는 디씨를 안하니 상관 없는 일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개발자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포토샵으로 고해상도 그림을 도트化한 것이 맞다.-20)

 

저 위의 달도 그렇고, 중간중간 감탄사가 나오는 아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