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그 역시 기사라는 신분의 용병인 것이다
8월 중순이었다. 배틀 브라더스의 Warriors of the North 이후의 최신 DLC Blazing Deserts가 출시되었다. 신규 DLC 개발 소식은 올해 봄에 발표되었다. 그닥 덥지는 않았던 4월 정도로 기억한다. 늦봄 이후, 개발사는 코로나로 인한 개발 지연 사실을 포함, 그래픽이나 게임 정보, ost따위의 떡밥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해 왔다.
그리고 8월에 이르러 DLC의 출시가 임박했을 때,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일단 시작하면 또 끝도 없이 시간을 빨아먹힐 것이다. 늦여름의 더위에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게임을 사고야 말았다. 일주일정도 해놓고 보니 슬슬 발을 빼야 하는 지점까지 밀려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번의 게임 경험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때는 스팀 플레이타임을 대충 200시간 조금 넘겼었고, 지금은 500시간을 넘기고 있다. 게임의 컨텐츠 대부분을 훑어볼 수 있었다. 시간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원래는 다 깰라고 했는데 피곤해서 접었다
배틀 브라더스는 17년 출시된 턴제 SRPG다. 용병단을 키우는 게임이다. 어렵고 불합리한 게임이다. 모든 캐릭터는 HP가 0이 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즉사한다. 실제 시간으로 수십시간을 키웠던 어쨌던 죽으면 땡이다. 철인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세이브로드를 할 수도 있다. 자기 선택이다.
어렵기 때문에 꽤 재미있다. 용병단을 키운다기보다는 용병 개개인을 키우는 게임이다. 용병마다 재능을 살려 스탯을 찍어주는 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잘 짜여진 퍽 시스템에서도 파고들만한 깊이감을 찾아볼 수 있다.
왜 어려운가. 우선 용병 개개인의 영구 사망에 대한 압박감이 있다. 그리고 상대하는 모든 적들의 스펙(개인스펙이든 단위화력이든)이 결코 내 용병단보다 못하지 않다. 또한 아주 약간의 고민이라도 해서 내 유닛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여 상대 공격의 확률을 통제하지 못하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적 집단에게도 내 에이스 유닛이 개죽음을 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묫자리가 부족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발자들이 난수표를 이상한 개떡같은걸 썼다. 배틀 브라더스의 전투에서, 절대 다수의 행동은 확률에 기반하여 성패를 가린다. 이 확률이 거짓말은 아니다. 명중률이 100%인데 빗나감이 뜬다거나 하는 엑스컴에서의 촌극은 없다. 하지만 95% 확률이 연속적으로 서너번씩 실패한다던가하는 엽기적인 일이 자주 발생한다. 배틀 브라더스를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운이 좋거나 나쁜 사람들이어서일까? 자기 20% 맞춘건 기억 못하고 95% 맞춘것만 기억하는 일종의 뇌내 각색 효과일까? 로또사러 가야 할 운을 이 게임에다가 전부 몰아서 쓰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난수표의 상태가 유난히 메롱일 것일 뿐이다. 전체 시행의 확률을 일일히 모아서 검사하면 실제 확률은 액면가 비슷하게 나온다고 한다. 게임에서 표기하는 확률 자체는 사실이다 이 말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사람들이 조사해본 결과 유난히 난수 값이 높게 몰려있는 구간이 또 있다고 한다. 여기 잘못 걸리면 당연히 이겨야 할 전투도 95%가 연속으로 빗나가면서 져 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당연히 졌어야 하는 전투에서 이기는 경우는 없다. 왜? 애초에 공격 명중률이 10%정도에 불과할 경우 거기 매달리기보다는 더 높은 확률을 얻어내기 위해 공격 대신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히 더 효율적인 플레이인 경우가 많고, 실제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95%가 빗나갔다는 체험을 호소하며 배틀 브라더스가 쓰레기 게임이라고 호소하는 플레이어들은 유난히 많은데 비해, 5% 확률을 연속으로 뚫었다며 배틀 브라더스가 혜자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런 쓰레기같은 장난질 때문에 체감 명중률은 표기 확률에서 한 10%정도씩은 까야 한다. 표기 명중률이 곧 실제 명중률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대 AI 들은 이렇게 하고 있다. 명중률이 10%든 20%든 그냥 플레이어 용병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자주 맞춘다. 우리는 이런 쓰레기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굉장한 불합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난수표의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다. 난수표에는 어차피 미래의 확률까지 전부 적혀있으니 원자의 운동량이니 뭐니 어려운 것까지 알 필요도 없다. 난수책 옆에 펴놓고 즐겁게 즐겁게 플레이어들을 엿먹이고 있을 따름이다.
늘 있는 일 아닙니까?
불합리는 난수표 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게임은 철인 모드를 권장하고 있는 주제에(실제로 권장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퍼마 데스면 권장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면 죽어야지가 너무 많다. 모르면 죽어야지에는 대표적으로 돌죽이 있다. 하지만 돌죽은 한 판이 아무리 길어봤자 8시간이 안되고 보통 모르는 사람이 몰라서 죽기까지는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그런데 배틀 브라더스는 한 캠페인이 수십 시간에 달하는 게임이다. 철인 모드를 당당하게 넣어놓을거면 몰라서 죽는 일은 거의 없어야 양심의 출타를 의심받지 않을 일일텐데, 내 생각엔 개발자들 양심은 단체로 아즈카반에서 풀풀 썩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번 DLC에서 추가된 투기장이 그렇다. 투기장은 남부 사막의 세 도시국가중 한 군데에 자리잡은 시설이다. 상대하게 될 적들의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내 용병단에서 세 명을 골라 입장시킨다. 일단 입장하게 되면 후퇴가 불가능하다. 어이없는 것은, 알려주는 정보가 정말 (대략적)이라는 것이다. 고유의 이름이 붙은 챔피언이 적 목록에 있으면, 우선 얘가 어떤 직군의 챔피언인지부터 고민을 해야한다. 가위바위보 상성을 잘못 맞췄으면 우리 에이스 세 명은 그대로 전멸이다. 나흐체러가 적으로 등장할 경우, 얘네들이 대체 몇티어 나흐체러인지도 절대 안 가르쳐준다. 투기장에서만 등장하는 적으로 검투사가 있는데, 얘네들의 스펙 또한 밖에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에이스 세 명을 골라놓고 '얘네들 셋이면 안 죽겠지?' 하고 들여보내면 참피처럼 잘만 죽는다. 이 외 여러 전설 던전들도 그렇고, 옆에 위키라도 켜놓은 게 아니면 철인으로 플레이하기는 정말 힘든 게임이다.
모래장난을 잘 치는 유목민씨
게임의 디자인과 컨셉은 좋은데, 솔직히 못 만든 게임이다. 뿌리부터 썩었다기보다는 마무리가 썩었다. 이런 압도적인 불합리는 나를 착각하게 한다. 난수표 악마의 하드 스팽킹이 내 신경계를 어지럽혀 고통인지 쾌락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눈먼 플레이어들은 갸우뚱 하면서도 게임을 접었다가 복귀했다가 반복하게 된다. 용병단 성장의 즐거움이 눈에 부시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내 용병 키우는게 재미있다! 게임이 어려우니까 성장이 재미있지 ㅋㅋ 하면서 퉁퉁 부은 엉덩이를 매달고 저벅저벅 폐지를 줍게 되는 것이다.
배틀 브라더스의 주전 멤버 성장은 포켓몬의 그것과 같다. 알까기를 하는 것이다. 미친듯이 알을 까게 된다. 인력시장에서 되는대로 용병몬을 사다가 면접을 본다. 그리고 실전개체가 아닌 것 같으면 바이바이, 용병몬!의 반복이다. 용병만 가챠하는 것이 아니다. 유니크 장비도 가챠한다. 유니크 장비란 일반 장비에서 몇 가지 옵션이 무작위 수치만큼 개선된 특수 장비들을 일컫는다. 당연히 입수처가 한정적이고 드롭률이 낮다. 우리는 최고 재능의 용병이 슈퍼 유니크를 끼고 도적떼를 학살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스팽킹을 감수하고 게임을 계속하게 된다.
신을 영접하다
그런 게임이다. 스토리텔링이나 이런건 솔직히 장식이다. 뷔페에서 먹는 치킨이다. 좋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껏 써놓은 게임의 불합리와 성장의 즐거움이 개발진이 예상했을지 못했을지 알 수 없는(일부러 허접한 난수표를 썼을까? 그렇다면 독일의 제갈공명들이 따로 없을 것이다.) 어떠한 동반 상승효과를 일으켜 드럽게 맵지만 찾는 사람은 찾아먹는 희한한 게임이 되었다.
DLC 컨텐츠의 경우 영역의 질이 좋지 않다는 말이 들린다. 개발사가 애초에 독일 소재라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글 패치에 힘쓰고 있는 배브갤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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