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1. 2. 4. 19:24

 오리건에 대한 우리의 권리는 가장 정당하며 가장 강력합니다. 이 권리는 우리의 명백한 운명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운명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자유에 대한 위대한 실험과, 연합된 자치정부를 위해, 대륙의 끝까지 확장해야 하는 의무를 뜻합니다.

 일종의 화면보호기에 가까웠다. 더 정확하게는 전원보호기라고 표현하면 될 것이다. 여느 컴퓨터에게나 그렇듯, 내 컴퓨에게도 역시 방황의 시기라는 것이 있었고,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무사히 지나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는 감상이다.

 컴퓨터가 자꾸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문제는 없다. 이 별안간의 점멸은 내가 점찍기로 소일할 때에도 어김없이 발생해, 으레 몇시간의 작업물을 날려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 나이대 컴퓨터들은 다 그렇다. 누구에게 물어도 원인은 불명확했다. 바이오스쪽, 보드쪽 문제가 아니냐는 조심스런 추측만 나왔을 뿐, 결국 민간신앙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민간신앙이 매번 그렇지만 일부 처방은 근거 없는 특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는 유튜브 틀어놓기. 컴퓨터가 아무 일도 안하면 픽 꺼진다는 무근거한 추론에 심취해 있던 난, 적은 자원이라도 계속 사용하면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때 주로 틀어놨던 것은 슈퍼자이언트의 ost(베스쳔, 트랜지스터), 그리고 누자베스 디스코그래피 약 8시간. 효과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없을 때도 있었다.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낸 이후로 유튜브 처방은 뒤로 밀려났다.

 신약은 엔드리스 레전드였다. 단지 엔드리스 레전드의 메인 화면을 켜놓는 것으로, 당시 내 컴퓨터의 전원 안정성은 눈에 띄게 높아지는 것이었다. 이 심오한 컴퓨터의 세계란..

이렇게 오래 해 놓고 도전과제는 반 밖에 못 깼다

 때문에 내 엔드리스 레전드 플탐은 530시간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게임 경험은 200시간을 조금 넘을 것인데, 4X에서 이 정도 플탐이면 사실 뉴비에 가깝다. 문명6 씬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플탐이다. E-연공서열같은 농담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4X 장르는 시스템이 복잡한 경우가 많아,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곤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익숙해지기 전까진 꽤나 어렵다.

 게임을 구매한 직후 보통-어려움 난이도까지는 금방 깼는데 엔드리스 난이도는 쉽지 않았다. 문명 시리즈로 치면 신 난이도에 해당하는 단계다. 그걸 나중에 깨야지 깨야지 하다가 몇 년이 지나 20년 말일 언저리에 진지하게 붙잡아봤는데, AI 보정상 빡센 초반만 버티면 중반부터는 그냥 쉬웠다. 중턱부터는 완만한 것이 바닷속 대륙붕같달까. 어떤 식인지는 후술하기로 하고.

 유비소프트 출신의 두 개발자를 주축으로 설립된 엠플리튜드 스튜디오는 전략과 비주얼에 초점을 두고 게임을 개발해오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11년 설립 이래 몇 가지 전략 게임을 출시해온 바 있다. 첫 게임은 우주 배경의 4x인 엔드리스 스페이스, 재작년에 리뷰한 던전 오브 디 엔드리스, 그리고 세 번째 타이틀이 판타지 배경의 유사 문명 엔드리스 레전드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엔드리스 레전드는 2014년 출시되었는데, 대전략 시뮬레이션, 컴퓨터 보드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4X라는 명칭이 가장 정확하다.

 게임은 아우리가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한 때 이 행성은 세계관의 근간이 되는 고대의 신적인 존재들, '무한 종족'의 거대한 실험장이었는데, 무한 종족이 우주에서 자취를 감추고 난 이후로도 이들의 실험에서 비롯된 극한의 생물학적,지정학적 다양성은 쇠퇴하지 않아서, 판타지 소도구 박람회같은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많은 종족들은 어머니 아우리가라고 부르고 있다.

IT WOULD MY HONOR. TO BE YOUR NEW STEPFATHER.

 이 행성은 현재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기후 변화에 직면했다. 점점 길어져가는 겨울은 모든 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고, 행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다른 팩션과의 경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승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임의 진행 자체는 문명 시리즈를 연상하면 쉽다.쉬운 수준이 아니라 다를게 없다. 맵은 문명5 부터 도입된 육각 타일이며 고저차에 따른 이동 장애가 있고, 턴 방식은 AI전 포함 동시턴 진행이라는 점만 빼면 똑같다. 문명에서는 AI 행동은 따로 돌아가니까.

 몇가지 차이점을 더 짚어보자면, 우선 문명6의 도시국가로 대표되는, 통칭 마이너 팩션 시스템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역마다 종속된 1~3개의 소수민족 부락이 있는데, 야만인처럼 중립 부대를 주기적으로 뽑아낸다. 이들을 평정하면 해당 지역 도시는 소수민족 부락의 수만큼 일꾼 보너스를 받는다. 평정된 소수민족은 제국에 편입시킬 수 있고, 소수민족의 종류에 따라 제국 단위 생산량/전투력 보너스를 받으며 소수민족 고유 유닛을 제국 병종에 편입시킬 수 있다. 종주국을 강탈한다던가 하는 플레이는 불가능하다.

 얘네도 옥석이 있긴 한데

 위서 한 차례 언급했던 지방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일정 범위의 타일은 한 지방으로 묶이는데, 각 지방엔 하나의 도시만 설치될 수 있다. 바로 옆 타일에 있다고 해도 타 지방의 자원은 채취할 수 없고, 타일 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방 안에서라면 자원 타일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지방마다 타일셋이 다르다. 당연히 산출량도 다르고, 자연스레 도시계획은 특정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은 퀘스트로, 각 팩션마다 고유의 메인 퀘스트가 있어 이걸 모두 수행하면 게임에서 승리하며, 이와 관계없이 무작위 보상이 반환되는 서브 퀘스트들도 많다. 조건이 보상과 관계없이 살짝 까다로운 경우가 많아 게임이 중반만 가도 손도 못 댄 퀘스트가 흔히 쌓여있다. 메이플스토리처럼... 그리고 퀘스트 보상은 대부분 무작위다. 캐주얼하다.

이걸 언제 다해요

 퀘스트 승리를 비롯해 여닐곱 가지의 승리 방법이 존재한다. 대체로 땅따먹기를 잘 하면 달성하게 되는 패권/확장/전멸 승리, 돈 많으면 경제 승리, 과학 높으면 과학 승리, 동맹 많으면 외교 승리, 기타 불가사의 승리 점수 승리 등... 승리 조건이 단순한 편이다. 예를 들어 문명6의 과학 승리의 경우 오프월드 미션이라고 해서 로켓을 쏘고 우주공항을 올리고 할 게 많은데, 엔드리스 레전드의 경우 깔끔하게 필요한 과학기술 5개만 다 찍으면 승리 화면을 띄운다.

승리 당했다

 플레이어블 메이저 팩션의 경우 본편 9가지, DLC 5가지다. 굉장히 개성적이다. 비주얼이나 설정 면에서도 그렇고, 인게임 플레이에서도 그렇다. 문명 시리즈의 경우 고유 유닛이나 건물에 초점을 맞추고 테크 최적화를 통한 타이밍 찌르기로 확장을 노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게임의 경우 확장과는 큰 관련이 없는 승리 조건을 지향하는 팩션이 여럿 있어, 군사력은 견제 내지 자기 방어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꽤 많다.

 슬슬 솔직해져야 하는 타이밍인 것 같다. 사실 난 4X를 잘 모른다. 해본 타이틀이라곤 문명6이랑 이거밖에 없다. 친척 관계에 있는 시뮬레이션이나 타이쿤의 경우 몇 가지 더 해보긴 했지만, 본격 4X에 시간 때려박은 것은 이 게임이 처음이다. 그도 그럴게 이 유사 문명류는 그 가짓수부터가 적은 희귀종이다. 애초에 문명 시리즈 하나만으로도 TO가 꽉 차는게 아닌가 싶다. 게임을 조금 해 보면서 정리되는 생각이 있다면, 엔드리스 레전드는 대단히 재미있는 게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4X 내지 시뮬레이션들이 대체로 그렇다지만, 하다보면 후반부가 굉장히 지루하다. 확장 내지 패권 승리의 경우 더욱 그렇다. 확실하게 게임의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승리 화면을 보려면 3시간 내지 4시간은 더 투자해야 하는 끔찍한 경험을 자주 하게된다. 확장을 거듭해 소유 도시가 많아지면 일일히 생산물 지정해주는것도 아주 귀찮다. 다행히 AI가 자동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옵션이 있어 그나마 낫지만.

컬러풀해서 이쁘긴 한데..

 내 생각엔 결국 지루해지기 위해 하는 게임이다. 친척인 시뮬레이션이 보통 그렇다. 별다른 클리어 조건 없이 자기 만족이라는 이름의 결승끈을 하나 매달아놓는 게임들. 물론 엔드리스 레전드는 어엿한 경쟁 게임으로서, 다양한 승리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지만, 플레이의 핵심 자체는 다른 시뮬레이션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한다. 그리고 계획에 장애가 닥치면 극복한다.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는 판세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타이쿤이나 4x나 똑같다. 그렇다면 후반부의 지루함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원인이란, 그 직전까지의 재를 이끌어냈던 자신의 당초 계획이 될 것이다.

 잘 짜인 계획일수록 변수의 영향력은 제거된다. 여기서도 입안자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변수의 영향력이란 곧 위기감이고, 위기감이 없다면 감흥이 없어진다. 갈등 결여의 표본을 찾자면 쿠키 클리커가 있을 수 있다. 돈을 모아서 할머니를 더 살까 공장을 더 살까 비교하다가 결국 한 가지 결정을 내리고 선택의 결과를 지켜본다. 할머니를 사이보그로 개조할까 쿠키 블랙홀을 살까 고민할 때 즈음엔 이제 질린다. 쿠기가 1항하사 개든 1아승기 개든 별 감흥이 없어지는 것이다.

 변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오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인내심은 자원이다. 시간 및 기타 피로와 비례해 소모된다. fm을 떠올려보자. 감독이 된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전략으로 팀을 이끌어 리그전에 임한다. 자신의 전략이 신통치 못하면 전체 경기를 쭉 봐서 개선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리그 1위로 승승장구중이라면 중요 장면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짧게 이야기해서, 계획 수립, 계획 실행, 결과 관찰이라는 3단계 진행과정에서 시간 비용이 큰 것은 "계획 실행"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fm에서는 이 부분의 시간 비용을 플레이어 임의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누르는 즉시 쿠키를 1 무량대수만큼 지급하는 버튼이 있다면 어쨌든 누르긴 누를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엔드리스 레전드에는 이런게 없다.

 

혹은 승리 자체를 목표로 잡지 않는다면

 AI는 GG를 치지 않는다. 내가 이길게 100% 확실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직접 승리 화면을 보려면 긴 시간에 걸친 노오력이 필요하다. 이런 게임에는 종종 후반에 지루하지 말라고 후반 위기라는게 들어가는데, 경쟁 게임 특성상 애매했던 것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런거 없다. 문명6에는 이와 비슷한 시스템이 있긴 하다. 도시에 운석이 떨어진다던가 해안선이 잠긴다던가 뭐 그런게 있는데, 기본 설정으로는 꺼져있다.

 엔드리스 레전드만의 문제인지 4X 공통의 유전병인지, 아무튼 후반가면 지루하다. 플레이어 스스로 후반 위기를 연출한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은... 사실 하려고 들면 할 수는 있다. 특정 시설을 안 짓는다던가. 시뮬레이션과 마찬가지로 그런 쪽 자유도가 있는 게임이니까. 그런걸 굳이 시킨다면 또 넌센스겠지만.

게임이 전투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각 유닛의 장비를 일일히 바꿔줄 수 있고, 장비마다 옵션도 많이 다르다. 장신구 쪽 옵션이 특히 다양하다. 30가지는 된다. 그런데 막상 전투는 자동으로 한다. 애매하다. 전투를 수동으로 한다고 딱히 자동 전투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다. 멀티방에서는 아예 무조건 자전으로 한다. 땅볼이다.

이제보니 디디디 망치 같은 걸 들고있다

 보통 그렇지만 AI가 별로다. 난이도 설정의 경우 AI 산출량 보너스 및 기타 보너스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데, 이게 초반에는 강렬하지만 후반 들어가면 AI가 다 바보가 된다. 개발사의 노하우 부족이 아닐까.

그렇군요..

 출시 초기 개발자 인터뷰다. 간단히 번역하자면 "우리 게임 이뻐요" 정도인데, 정말 그렇다. 사실 엔드리스 레전드 개발할 당시의 초기 앰플리튜드는 규모 면에서 보자면 인디 개발사에 가까웠는데, 비주얼은 굉장히 뛰어났다. 5년 전 기준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봐도 꽤 세련된 모습이다. 3D나 UI 퀄리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관이나 캐릭터, 크리쳐 디자인, 컨셉 아트 등, 여러모로 참 괜찮은데, 나도 여기 끌려서 게임을 샀다고 할 수 있겠다. ost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종합하자면 우주갓겜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 게임이다. 게임의 각 요소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전략 게임치고는 퍽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데, 이것저것 뭐가 많다보니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하다. 팩션마다 개성도 있다. 지형 세팅도 꽤 자유롭다. 무엇보다 디자인이 이쁘다.

 개발사 규모나 게임 완성도를 고려해 생각해봐도 문명 5,6에 비해 멀티 씬이 영 활성화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내 생각엔 전투 시스템이 번거로와서가 아닌가 싶다. 플레이어간 전투가 걸리면 이게 끝날 때까지 턴이 넘어가지 않는다. 전장에 시야가 없다면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누구 말마따나 멀티로 하기 좋은 게임은 아니긴 하다.

 엔드리스 레전드 이후로 앰플리튜드는 세가 산하 스튜디오로 들어가게 되었다. 엔드리스 스페이스 2를 성공적으로 내놓은 후 휴먼카인드 개발에 들어가 21년 4월 출시 직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간의 경험에 대한 노하우를 기대할 수 있다면, 혹은 앰플리튜드의 아트웍을 좋아한다면 휴먼카인드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1년 4월 23일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