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0. 2. 13. 04:28

최초작성: 2018. 12. 30. 19:19

언젠가, 네가 말했었지. 과거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하지만 정작 과거에 얽메여 있는 건 네 쪽이잖아.

 나는 총쏘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FPS, TPS, 슛뎀업 가리지 않고 별로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못하기 때문이다. 좀 더 거창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종교적 신념으로 살생을 묘사하는 게임이 거북하다던가 하는 특이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어렸을 때에는 좀 더 좋아했었던 것 같다. 버블파이터를 꽤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척 집에 놀러가서 사촌 형 방 컴퓨터에까지 깔아가며 했었다. 언제부터인가 피지컬 위주의 게임들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동체시력이 떨어진다거나 반사신경이 떨어진다고 여기게 된 이후로 거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하려고 살짝살짝 건드린 것들을 빼면 자의적으로 게임을 골라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게임을 건드렸다는 것 자체가 살짝 희한한 일이다. 물론 게임은 도트 그래픽이긴 하지만, 썩 내 취향의 도트는 아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로, 엔터 더 건전은 크게 분류하자면 로그라이크에 우선하여 들어가기는 하지만, 높은 탄막의 난이도로 정평이 난 고인물 지향적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피지컬이 바닥을 기는 내가 선뜻 건드려 볼 만한 게임은 아니다. 건전? 총? 피지컬? 거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슬쩍 한 번 보고 지나가는 정도의 로그라이트? 첫인상은 그렇다.

 여하튼 역시 난 엔터 더 건전을 살 생각이 없었다. 이 게임이 최초 출시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출시 전부터 알던 게임은 아니었고 스팀 세일 대기열을 대강 넘기다가 한 번쯤 지나가면서 본 정도의 면식이었다. 후일 인터넷 친구가 츄라이 츄라이 하는 모양새를 보고 인터넷 방송으로 실 플레이를 접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게임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여러 주인공들이 건-전을 탐험한다는 이야기다. 건-전의 잡동사니 만물들은 대부분 총을 모티프로 삼아 디자인되어 있다. 대부분의 적과 일부 장식물, 지형지물에서 총에 대한 집착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많은 적들과 보스들도 디자인 요소 일부에 총이 들어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적인 건-데드는 걸어다니는 총알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드롭되는 무기도 총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무위키의 엔터 더 건전 항목 세부항목을 보자. 아이템과 총들의 목록은 타 영상물에 등장하는 화기나 물건들에 대한 오마주로 빼곡하다. 일일히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름의 재미가 될 것이다.

포켓몬 도감이 생각난다.

 

 캐릭터마다 조금씩 다른 초기 장비를 들고 건-전에 다이빙한다. 각 층을 정리하고 보스를 잡으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데, 5층까지 가면 게임은 클리어다. 각 층마다 2개의 상자방, 상점, 보스 루팅이 확정적이다. 그 밖으론 방을 클리어하면 랜덤한 상자나 아이템이 가끔 떨어지는 정도다. 층마다 적어도 서너개의 아이템은 받을 수 있는 셈이다.

 

 건전 내부에서 얻는 재화를 사용하거나, 특정 조건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추가 아이템들을 언락할 수 있다. 특색있는 아이템이 많으므로 열어주면 좋다. 게임의 메인 모드인 건전 다이빙 외에도 여러 부차적인 게임모드가 더 있다. 보스만 잡는 모드, 타임어택, 특정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는 모드 등, 구색 갖추기에 필요한 만큼 있다.

 재미있는 로그라이크의 필수 요소는 무엇일까. 퍼마 데스도 중요하겠지만 그것 자체로 게임이 재미있어지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변수 다양성이다. 매판 달라지는 상황에 적응하고 플레이어 스스로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것이 로그라이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0)

 

 하지만 초창기의 엔터 더 건전은 이러한 로그라이크의 기본 문법에 충실하지 못했다. 쓰이는 총만 쓰이고, 쓰이는 아이템만 쓰이고, 어떤 패시브 아이템은 먹든 말든 티도 안 난다. 그러면 다양성이 퇴색된다. 특수 이벤트도 보기 힘들었다. 캐릭터 자체 스펙은 육성할 수 없으니 루팅에 전념해야 하는데, 그 요소에 금이 가 있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보스전 때 피해를 받지 않고 클리어하면 추가 체력을 2만큼 주는데, 이게 꽤 크다. 피통이 있고 없고 차이도 있고, 추가 체력 2 자체도 상자에서나 드랍되는 사양의 아이템인만큼, 보스전 루팅이 1배냐 2배냐의 체감도 있는 것이다. 고인물 지향적인 게임인 것은 분명하다.

 

5층 보스전 문앞이다. 입수한 패시브 아이템과 총의 비율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6년 출시 이후 몇 번의 업데이트와 확장팩 수준의 대형 패치로, 게임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구매 초기에 나는 이 게임은 로그라이크보다는 탄막 슈팅의 카테고리에 우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지금은 나름 괜찮은 로그라이크처럼 보인다. 우선 아이템의 드롭률이 전반적으로 올라갔다. 각 런마다의 진행 상황과 아이템 루팅 상태가 대체로 비례적인 그래프를 그리던 이전과 달리, 지금의 엔터 더 건전의 그래프는 상당히 굴곡지다. 탄약의 드랍률이 올라가니 체감 난이도도 조금 낮아졌다. 나같은 피지컬 고자도 충분한 시간만 꼴아박으면 클리어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성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총기는 아예 버려지는 경향도 줄었다. (시너지 시스템이 도입된 것이 컸다. 인위적이긴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20) 괜찮은 게임이 되었다.

 설계 밖의 이야기를 더 하자. 앞서 적어두었듯 게임은 픽셀 그래픽이다. 초기 그래픽에 비해서도 지금은 꽤 발전한 편이다. 불필요한 그물점도 줄어들었고, 그라디언트 광원도 꽤 잘 쓴 편이다. 그래픽이 쓸데없이 화려하면 전투 집중도가 떨어질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총기마다 독립적인 재장전 모션이 찍혔는데, 이것도 보면 눈이 즐겁다. 전투하면서 손 눈 바쁜 와중에 모션까지 관찰하고 있을 시간이야 없겠지만, 만족스럽다. 총기 이펙트도 꽤 화려하다. 레이저 무기는 주변광이 확실히 만들어져있고, 희귀 총기의 경우 수준이 더 화려하다. 

 

 

 게임은 여러가지 기본적인 요소에 충실한 편이다. 게임 디자인적 결점은 최근의 대형 패치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커뮤니티에 체계적으로 쌓인 정보는 두텁다. 게임 자체의 난이도는 어쩔 수 없겠지만. 재미를 보조하는 어려움이다. 이정도는 감수하고 해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