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를 생각해볼까요. 시체는 거북하고 두려운데, 사람까지 공격하니 더 끔찍하지요. 그러나 수많은 작품에서 좀비는 열연(熱演) 중입니다. 사랑받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좀비가 있는 세계'일 겁니다. 환상종도 마찬가지겠지요.
페이 택틱스의 난이도 구분은 두 가지다. 노말과 하드인데, 디자인상의 결함이 있어 하드 난이도는 플레이가 상당히 괴롭다. 그런고로 스팀 유저 평가는 그 작성자가 어떤 난이도로 시작했느냐에 따라 추비추가 갈린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도전적인 전략 게임에 흥미, 조예, 취미가 있다면, 난 하드를 권하고 싶다.
이 게임은 Endless Fluff라는 뉴욕 소재 2인 인디 개발팀의 작품이다. 그들이 개설한 홈페이지엔 게임 개발이나 세일, 업무와 관련된 소식 외에도 가족과 아이들, 일상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온다. 그들의 첫 번째 게임은 Legend of Fae이다. 퍼즐 게임이며, Fae Tactics와 세계관을 공유하는데, 장르적인 연관은 딱히 없다.
2011년 스팀 출시. 인디치곤 굉장히 이른 편. Bastion보다 한 달 빠르다.
게임은 2016년에 첫 삽을 떴고, 2020년에 정식으로 출시했다. 오랜 개발 기간에서 미뤄 짐작컨대, 개발 과정에 난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발자들은 험블 게임즈의 배급 지원이 없었다면 게임의 완성이 요원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게임이다. 어쩌다 유튜브 같은데서 "택틱스 기대작 모음~" 이런 영상을 보게 되면 Children of Zodiarcs 같은 타이틀이랑 같이 묶여 나오는 것이었다. 작년 말 험블 먼슬리로 구입했다.
이 게임이 그리는 것은, 어린 마녀 피오니가 친구들(진행하다보면 추가됨)과 함께 세상을 구하는 여정이다. 게임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래픽, 그러니까 비주얼-아트 스타일이다. 딱 봤을땐 그냥 귀엽다. 왈가닥 여캐가 개랑 새를 데리고 다닌다. 캐주얼한 스토리겠거니 생각했으나, 첫인상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예상은 빗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래놓고 더 씽이니 크툴루니 하는 것들이 나온다.
FFTA 시리즈에서 그렸던 것은 허구성이 강조된 세상, 게임 속 세상이다. 어드밴스는 이런 허구의 세상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고뇌와 갈등을 표현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눈싸움이나 하던 어린 아이들이었다. "게임"의 세상 속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 지나친 잔혹성이란 불필요한 것이었으며, 배제되었다. 시스템적으로도 "로우"같은 부속재가 보조하여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서사를 보호하고 있다.
제목이나 시스템, 기타등등 많은 면에 비춰봐서, ffta와의 비교는 불가피한 것이며,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아트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게, 페이 택틱스의 세계는 사악과 폭력,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계의 악당들은 대부분 단순한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며, 하는 짓거리는 잔혹하고, 근본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동기가 납득이라도 가는 경우가 정말 몇 없으며, 악당으로서 매력적인 캐릭터는 하나,둘. 그리고 나머지는 싹다 삼류 도적들이다.
진자 싹 다 죽이면서 다닌다
보여지는 것은 완전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였다. 인상과는 갭이 느껴져, 퍽 매력적이었으며, 저마다 기묘한 사연을 품은 동료 캐릭터들로 이뤄진 캐러밴에서 연상되는 것은 젤라즈니의 히페리온이다. 게임의 핵심 서사는 게임적 문법으로 쓰인 모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나, 곁다리 이야기들이 꽤 재미있다. 초반부 분위기는 그냥저냥 귀엽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호러로 급가속을 하는데, 텍스트만 보면 판의 미로보다 더하다. 그리고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세계관도 점점 커짐
상점 페이지의 판촉 문구에 따르면, 커맨드 화면이 없는 독특한 턴제 전략 게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투 중, 매 턴마다 주어지는 선택의 폭이 꽤 좁기 때문에, 물흐르듯 진행할 수 있었다. 페이 택틱스의 전투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는 한데, 또 전략의 다양성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처음 얘기했던 전투 디자인의 결함, 정확하게는 불합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전투 구성 자체는 택틱스 하면 생각나는 그거다. 택틱스 오거나 ffta랑 비교하자면 그들보단 맵을 좁게 사용한다. 전투 참가 인원수가 적기도 하고, 유닛의 밀도 자체도 높다. 지형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고, 전투 디자인을 먼저 보는게 낫겠다. 짧게 얘기하면 턴마다 주고받고 때리는게 다다. 유닛은 리더 유닛과 소환 유닛으로 나뉘는데, 리더 유닛은 주인공 캐릭터를 포함한 중요한 유닛이고, 소환 유닛은 덜 중요한 유닛이다. 소모품에 가깝다.
페이 택틱스의 유닛은 저마다 굉장히 독특하다. 잡졸부터 주인공까지 전부 봐서 설계가 겹치는게 거의 없다. 스테이터스 창에 표기되는 여러가지 속성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가지는 몇 가지 원소 타입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포켓몬의 타입을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약점 타입을 찌르면 데미지가 2배고 역상성을 찌르면 반이다.
잘 안외워진다
피차 데미지 출력에 비해 유닛의 hp가 낮기 때문에, 소환 유닛이든 리더 유닛이든 약점 찔리면 한방에 눕는게 일상다반사다. zoc가 있는것도 아니라서 전선 유지가 안된다. 명중과 회피율 시스템은 있으나, 큰 비중은 없다. 약점 속성을 찔렸을 때 뜨는 치명타는 있으나 확률적 치명타는 없다. 유닛의 내구도 전반적으로 부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횟수가 적으며, 결론적으로 캐주얼하다.
리더 유닛의 경우, 유닛의 hp가 0이 되어도 바로 죽지 않는다. 빈사상태로 있다가 3턴 뒤에 부활한다. 이 상태에서 다시 처맞으면 hp 대신 생존력 게이지가 닳는데, 기본적으론 3대를 버티고 나중에 가면 8대까지 버틴다. 생존력 게이지는 전투 중 회복할 수 없다. 하스스톤 얼방이 8개 있다거나, 다키스트 던전 데스도어가 8번 터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지간하면 유닛 죽고 퇴각하는 상황은 안나온다. 대신 hp 0찍고 바닥에 누워서 골골거리는건 전투마다 예정된 수순으로, 너한방 나한방이라는 전투 구조의 안전장치이자, 게임의 캐주얼한 방향성을 다시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상태에서 6대 더 쳐야함
캐릭터를 내 입맛대로 "육성" 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50 레벨 전후로 엔딩을 볼 수 있는데, 스탯은 60레벨까지 골라서 찍어줄 수 있다. 골라서 찍을 수 있는 스킬이나 스킬 포인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기술 폭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아이템 장착 슬롯은 3칸이다. 캐릭터의 컨셉과 속성이 크게 바뀌는 "장비" 슬롯이 하나 있고, 피해량, 회피율, 이동력, HP 재생 등 스탯에 유의미한 보너스가 들어가는 "두루마리", 그리고 평타 횟수에 반응해 약한 주문이 나가며, 미미한 스탯 보너스가 달린 "보석" 까지 셋이다. 레벨 업마다 찍을 수 있는 스탯을 포함한 모든 변형자는 항상 플레이어 마음대로 다시 세팅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스킬 포인트를 항상 환불받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고, 미리 결론내리자면 이 게임은 운영 요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위 전략 게임들은 전략 화면과 전술 화면을 나눈다. 엑스컴과 마-블이 그 예로, 여기서 전략 화면이란 파티 전체가 이동하며 물자를 소비하고 거점에 들린다던가 심볼 인카운트가 돌아다닌다던가 하는 화면을 말하며, 전술 화면이란 직접 캐릭터들이 나와서 턴제든 실시간이든 싸우는 화면을 말한다. 월드 맵과 인카운트라는 어휘를 사용할 수도 있겠다. 페이 택틱스의 월드 맵 화면에서 하는 일은 이러한 캐릭터 스탯의 조정, 다음 갈 맵 정하기, 요리-간단한 카드 뒤집기 퍼즐 풀고 스탯 보너스 받기- 뿐으로, 달리 운영스러운 요소는 없다.
등장하는 카드셋을 내가 바꾼다던가 할 수는 없다.
이래저래 가장 밀도가 높은 곳은 전투다. 캐릭터 스탯이나 장비도 미리 조정하고 시작하며, 타입 상성이니 뭐니 해서 금방금방 죽어 전략적인 선택의 횟수가 많지 않고, 데미지 출력에 비고정 범위(데미지 룰렛)가 있는것도 아니다. 전투 시작 전 세팅에서 대강의 승패가 갈리는 셈이다. 가볍다고도 간단하다고도 할 수 있고 깔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게 꼭 쉽다는 뜻도 아니고. 난 재밌게 했다. 그런데 정말 문제였던 것은 게임 진행 중 일부 구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스탯 수치상의 결함이다.
맨 처음에도 언급했고 중간에도 한번 또 얘기했는데, 이것을 "결함"이라고 단정지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껄끄럽고, 불합리한 문제가 생기는 구간이 있다. 노말 난이도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하드에선 많은 플레이어가 똑같이 겪는 문제같은데, 간단히 얘기하자면 '적이 나보다 빨리 쎄지는 현상' 이다.
페이 택틱스는 지역마다 몹의 레벨이 고정된 것이 아닌, 플레이어 파티 레벨의 평균에 따라 항상 상대 몹들의 레벨도 스케일링되는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다. 레벨 노가다가 원천 차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어떻게 진행하다가 레벨이 30쯤 되면 상대 유닛의 스탯이 우리 유닛보다 월등히 높아져, 우리 딜은 안들어가고 상대 공격엔 한방에 눕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스탯이 깡패라고 역상성 공격 한방에 주인공이 눕기도 한다. 이쯤 되면 진짜로 매턴 다같이 눕는다. 타개하려면 지금까지 모은 아이템, 주문, 소환 유닛을 총동원하여 약점을 찌르든 해야하는데, 이 시점에선 속성마다 다 찌를 수 있는 수단이 있는게 아니라서 애매하다. 치코리타 하나 들고 성도 도장깨기를 하려고 하는데, 상대 관장의 포켓몬이 레벨 스케일링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와닿을까?
이 전까지는 대충대충 해도 진행이 막히지 않고 어쩌다 한번 재시도하고 그러는데, 이 구간에선 갑자기 어려워져서 진지하게 최적화세팅하고 몇번씩 재시도해가며 깨야한다. 근데 이 구간만 지나면 여전히 쳐맞는건 아파도 우리도 딜이 들어가는데다, 힐러도 괜찮은 유닛이 둘이나 들어오기 때문에, 또 괜찮아진다.
내가 죽든 적이 죽든 뭐가 빵빵 터지니 보는 건 재밌다.
이것은 분명 난이도 조정의 실패일 것이다. 캐릭터 입수 타이밍이나 스탯 조정 등등, 충분한 확인 작업이 있었다면 고쳐질 수 있는 부분이다. RPG라면 그렇겠지만, 이걸 전략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어려움 난이도의 페이 택틱스는 꽤 도전적인 전략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건 너무 쉬우면 재미없다. 하지만 또한 이렇게 RNG를 상당히 배제한 채로, 빠른 템포의 전투를 만들어 놓았으니, 가벼운 전투를 지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인터뷰(하이퍼링크)에 따르면, 그들이 지향했던 것은 접근성과 속도감이다. 전략성과 대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어렵냐 쉽냐로 굳이 따지자면 쉽게 만드려던 것이 맞을 것이다.
결국 잘 모르겠다. 쉬운 난이도로 하는게 정답이었던 건가? 괜히 어려움으로 해서 사서 고생한 것일까. 경험한 것에 비춰 얘기하자면, 그들은 어쨌든 페이 택틱스만의 전투 경험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스탯 쳐발려서 역상성 원콤날때는 화가 나는데, 이길때는 공중제비 돌면서 묘기당구 쓰리쿠션으로 다 죽이니 재미있다. 이런 건 결국 다 개인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으니, 어려움 난이도 폴리싱만 잘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감상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보스전마다의 고유 기믹도 재미있다.
방향성 혼란과는 별개로, 단순히 "번거롭고 불편한" 사족같은 요소들에 대해서도 살짝 이야기하려고 한다. 리더 유닛 소환 유닛을 가리지 않고 저마다 개성적이라는 것은, 재미있긴 하지만 좀 귀찮다. 유용하게 쓰이는 특징도 있지만 전혀 활용되지 못하는 특징도 있다. 일례를 들어, 페이 택틱스엔 인게임 날짜가 있어서, 월화수목금토일이 표기되는데, 각 요일마다 특정 속성의 유닛이 강화된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날짜는 플레이어가 원하면 그냥 넘길 수도 있다. 번거롭기만 하다. 새 게임을 시작하게 되면 탄생 별자리(생일)을 입력하게 되는데, 여기서 정해진 별자리에 따라 또 특정 속성의 유닛들이 강화된다. 게임 중간에 바꿀 수도 없다. 진짜 없어도 되는 시스템이다.
사방 전체 공격이라지만, 스탯이 딸리니 날아다니는 참피일 뿐
맵의 경우 좀 좁게 쓰는 편이다. 그리고 고저차 활용성이 적다. 지형에 따른 이동 제한을 받는 유닛이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날아다니거나 텔레포트하거나 그런다. 게임의 전투 전반이 1~2타일 내 근거리 교전이라, 맵에 대해 이 이상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보기 좋냐로 따지면, 괜찮긴 한데 엄청 이쁘진 않다.
서사적인 의미에서, 페이 택틱스는 엔딩에 큰 의미가 없다. 주인공이 여행을 시작한 목표는 중간에 이뤄진다. 동료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대부분 합류 이전 시점에서부터 완결되었다. 스토리 중간부터는 이미 에필로그에 가깝다. 잔잔하면서도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전투 경험에 대해서는,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껄끄럽고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도전적이고 재미있었다. 캐주얼한 스토리 SRPG를 원하던, 도전적인 전략 RPG를 원하던, 각 영역에서 충분한 포만감을 안겨주는 게임이다. 이런 게임에 관심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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