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하는 것으로 하나의 장르가 만들어지는 게임이 있다. 이를테면, 로그, 다크 소울, 리니지 같은 타이틀이 있다. 파생되는 장르는 이들 타이틀의 어미에 ~like가 붙는 명칭을 갖는다. 계속하자면, 로그라이크, 소울라이크, 리니지라이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단일 게임에서 파생된 장르라는 것은 비-파생형 장르와는 그 결이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로그라이크"라는 장르명을 내세운 게임은, 몇가지 엄격한 디자인적 조건을 충족해야만 로그라이크 근본주의자들에게 '로그라이트'로 강등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특징적인, 독특한 장르라는 것이고 나쁘게 해석하자면 그냥 디자인 짝퉁이 빈발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인데, 게임 개발자 입장에선 베껴서라도 만들어봐야겠다 싶을 만큼 장르의 원전이 재미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이 뭐시기 라이크의 대열에 합류할만한 자격을 갖춘, 비교적 새로운 게임이다. 자격을 갖췄다기보단 이미 합류했다. 이미 스팀에 흘러넘치고 있는 덱빌딩-로그라이크의 원류가 다름아닌 슬레이 더 스파이어다. (이하 슬더스)
슬더스는 그러나 장르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게임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 요소는 이미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것이다. 그것은 로그라이크와 덱빌딩으로, 양자간의 성공적인 결합이 성과를 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디 스튜디오에서 이정도면 만루홈런이다
로그라이크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 로그라이크를 측량한다. 베를린 해석의 건전한 신봉자도 있지만, 보통은 제멋대로의 기준을 내세워 로그라이크인지 로그라이트인지를 판가름한다. 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갖는 상실성, 반복적인 플레이를 버텨내는 내구력-다양성이다.
덱 빌딩이라는 것은 또 사실 새로운 장르인데, TCG등을 즐기기 위해 게임 시작 전에 덱을 준비하는 행동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동 자체가 게임의 중심이 되어 플레이어간 경쟁, 혹은 재미요소가 되는 디자인적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덱 빌딩의 시초가 되는 것은 보드게임 '도미니언'으로, 발매 연도는 2008년이다. 이래저래 상도 받으며 꽤 인기몰이를 했고, 아류작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타자의 경우 보드게임 카페에서 한 번 해봤고, 졌으며, 설욕의 기회는 이제껏 없었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장르적 과두정을 구성하는 두 거인은 로그라이크와 덱 빌딩이다. 이들은 절묘히 화합하여 인디 씬에 슬더스라이크라는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메가 크릿 게임즈는 2017년 11월 15일 슬레이 더 스파이어를 얼리 엑세스 출시했다. 프레스킷에 따르면 로그라이크와 카드 게임을 조합하여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덱 빌딩 싱글 플레이어 게임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메가 크릿의 공동 창업자중 한 명인 Anthony Giovannetti는 넷러너 티어덱 사이트를 운영하며 온라인 대회도 주최했던 넷러너 고인물이다. 이런 핵심 개발자의 이력에 비춰, 개발팀의 카드 게임에 대한 이해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2017년 말 얼리 엑세스 이후 정식 출시까지 1년간, 메가 크릿 게임즈는 50주 분량의 주간 패치를 해 왔다. 매 주의 패치 내용에는 단순 수치 조정, 버그 해결, 유물 추가와 삭제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디자인 방향성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었다. 후술한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다시 말하자면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이다. 50층 높이의 탑, 50개 분량의 인카운터를 거치며 전투를 수행, 이벤트를 보고 덱에 카드를 추가하고, 삭제하여 강한 캐릭터(덱)을 만드는 게임이다.
4개 캐릭터가 준비되어 있으며, 각 캐릭터마다 습득 가능한 카드의 종류, 일부 고유 유물, 물약이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각 캐릭터마다 사용하게 되는 덱 테마에도 차이가 생기고, 만들 수 있는 덱 컨셉도 크게 달라진다. 캐릭터마다의 밸런스는 무난한 편인데, 완벽하지는 않다. 캐릭터마다 1막(초반) 클리어율(생존률)이 다르며, 4번째 캐릭터 와쳐는 특정 카드 조합이 너무 강력해 덱 다양성을 잡아먹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당연하게도 싱글 플레이어 게임이므로, 보다 본질적인"재미"에 큰 영향이 없는 한 캐릭터마다의 출력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 진행은 크게 봤을 때 3개의 막(act)로 나뉘어 있으며, 각 막마다 고유한 여러 종류의 보스, 엘리트, 일반 몬스터가 분포되어 있다. 하나의 전투 인카운터에서 상대하게 되는 적은 1마리에서 5마리까지로 다양하며, 출현 가능한 적의 조합은 디자인 레벨에서 정해져 있다. 3개 막의 보스와 히든 보스까지 모두 잡게 되면 게임의 엔딩 크레딧을 볼 수 있다.
맵은 대충 만든 거미집처럼 생겼다
각 전투 인카운터의 승리 보상, 이벤트 인카운터, 상점에서 골드를 소비하여 카드와 유물을 보충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 각 캐릭터마다 고유의 시작 유물과 기본 카드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한다. 모든 카드는 5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공격 카드, 스킬 카드, 파워 카드, 부상 카드, 저주 카드의 5종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공격 카드는 공격하는 카드다. 스킬 카드는 공격 외의 모든 행동에 사용된다. 파워 카드는 한 번 사용하면 전투 중 계속 효과를 발휘한다. 부상 카드는 일회성 저주 카드고, 저주 카드는 덱의 자리를 차지하는 쓰레기 카드다.
부상이나 저주가 쌓이면 이렇게 된다
유물은 다양한 효과와 성능을 갖는다. 쉽게 생각하면 덱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파워 카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투에 기여하는 유물 외에도 다른 이벤트 인카운터와 관련된 유물, 단순히 최대 체력을 올려주는 유물, 돈을 300원 주는 유물, 덱에 들어오려는 저주 카드를 2번까지 막아주는 유물 등 다양하다. 습득 기회의 빈도도 카드의 경우보다 적기 때문에, 좋은 유물은 좋은 카드보다 더 좋다.
게임을 한 번 깨면 승천 모드가 열리고, 승천1을 깨면 승천2가 열린다. 승천은 20까지 열리며, 올라갈수록 종합적으로 어려워진다. 최대 체력의 감소, 적 행동 패턴의 강화, 적 데미지 강화, 보상 감소 기타등등. 더 높은 도전 목표를 제시해주기는 하지만, 난이도가 올라가는 탓에 시도할 수 있는 플레이 컨셉도 줄어든다.
영수증
두 장르간의 결합이라는 것은 디자인적으로 봤을 때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우선 결합 대상이 되는 임의의 모든 장르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필요하며, 장르적 심볼에 해당하는 디자인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뛰어난 창의력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작업임을 몇가지 게임들이 보여준 바 있으며, 슬더스 이후의 후속 덱빌딩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재미로든 상업적으로든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워 디펜스와 로그라이크가 결합된 던전 오브 디 엔드리스는 새롭고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Atomicrops는 직접 해보진 않았지만, dkn의 이야기에 따르면 꽤 괜찮은 게임이라는 모양이다. 아마 이 사람의 취향을 따져보면 도트 그래픽에서 가산점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액션 로그라이크와 농사 시뮬의 조합이다. 반면 문-라이터는 어지간한 똥겜으로, 액션 로그라이크와 상점 운영 시뮬이 결합된 게임이었는데, 시스템이 완전 각자 따로 노는데다, 각각의 완성도도 대단치 못해서, 별로 재미 없었다.
보기만 좋음
게임의 전반적인 진행은 로그라이크, 캐릭터 성장 과정은 덱 빌딩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바보같은 문라이터와 달리 이 게임은 각 카테고리가 서로 하나처럼 유기적으로 잘 묶여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도해 볼 수는 있겠다.
전투와 카드라는 관점에서, 이 게임에서 카드는 "자원"이고, 카드를 플레이하는 것은 "행동"이다. 매 턴 차오르는 마나 역시 "자원"이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당면의 과제(전투의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단일 전투에서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원이란 곧 행동력이므로, 잘 만들어진 규칙 아래 정형화시킨, 일반적인 턴제 전투 게임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혹은 그렇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비교적 특수한 점이라면, 매 턴 주어지는 선택지의 종류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상황적인 제한을 받는다는 뜻이 아닌, 말 그대로 무작위로 결정된다. 이러한 선택지의 제한이라는 것은, 매 턴 시작시의 드로우 매수가 결정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1마나를 사용해 카드를 3장 뽑는다는 행동은, 자원을 소모해 고려 가능한 선택지를 3종류 늘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하며 덱의 카드를 늘리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종류, 출현 가능성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덱에서 카드를 제거하는 것 역시 같은 작용을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덱의 '개선'이 곧 캐릭터의 성장이다.
이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로그라이크성이란 무작위한 유물과 카드 조합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유니크한 플레이(덱의 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조합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곧 이벤트, 전투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 나가는 일련의 비선형적 행동들은 모두 로그라이크의 핵심 가치에 가까운 것들이다.
한계에 다다른 40살의 솔개는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다만 이런 행동들의 총체는 사실 멀리서 보면 선형적이다. 위아래 층을 자유롭게 왕복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게 아닌, 직선적으로 올라갈수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한 판 플레이는 그렇게 길지 않은 편인데, 이 게임에서 레벨 스케일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임 진행에 따른 덱의 완성도(파워)를 고려하고자 했을 때, 합리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카드라는 핵심 테마 자체가 로그라이크라는 기치에 잘 어울린다... 주어지는 다양한 상황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하는, 또한 느긋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턴제라는 점에서, 카드 배틀은 여기 잘 어울린다.
전투 외의 이벤트에 대해서는 사실 별다른 이해도가 필요하지 않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한 부분, 숙련도가 쌓인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전투와 덱 빌딩 뿐이다. 이벤트의 선택지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편이다. 정갈하다. 3첩반상이다. 이벤트의 가짓수 자체도 적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전투 외 이벤트는 전투 외 수단으로 덱을 강화하는 방법에 가까운 것이지, 플레이로서 독립적인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로그라이크 요소가 차용된 덱 빌딩 게임인 동시에, 카드를 이용한 로그라이크라고 생각해야 한다. 서로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잘 섞어놓은 게임이라는 소리다. 문라이터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다. 문라이터 꺼져~
한편 게임 전체를 포괄적으로 보자면, 골드와 체력 역시 자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투와 인카운터를 통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소모, 교환하여 덱을 강화하고, 더 어려운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장비 3장이 모두 덱 맨 밑에 고여있다
개발자 노트에서는 플레이어가 패배할 때 cheated 당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게끔 조정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요즘은 하도 이런 상황을 그냥 '억까'라고 하니까 어휘 생각이 잘 안 났는데, 표준말로 하면 불합리한 패배 경험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의미다. 그 과정은 정식출시 전 50주간의 밸런스 패치 노트에 잘 나와 있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놀라운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카드 게임이 태생적으로 갖는 문제 상, 이런 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하기 힘들다. 패 사고는 언제든지 날 수 있다. 또한 게임에서 펼쳐지는 모든 상황이 합리적이라면, 그러나 그게 정말 재미있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패배는 불합리한 것이고 승리는 합리적인 것일까. 그것들은 어쩌면 비논리적인 승리 혹은 불가피한 패배와 양립할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개발자들은 여기서 가장 도움이 안되는, 불합리한 패배의 경우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슬더스 커뮤니티에서는 이에 대해, 절대 클리어할 수 없는 시드를 발굴하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링크)
싱글 플레이어인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캐릭터간의 밸런스는 꽤 잘 잡혔다. 캐릭터마다 카드나 등장 유물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상대하는 적 자체는 모든 캐릭터 공통이다. 캐릭터마다 상성상 더 쉽고 어려운 적은 있어도, 문제가 될 만한 수준의 격차는 없었다.
예를 들어 힘 관련 시너지가 많은 전사의 경우1코스트 노말 광역기인 '절단'의 피해량이 1회 8데미지인데, 관련 시너지가 비교적 부족한 도적의 경우 똑같은 1코스트 노말 광역기인 '단검 분사'의 피해가 2회 4데미지다. 공격 횟수로 인해 힘 수치가 올라갔을 때 추가적인 보너스를 받는 셈이다. 대강 이런 방식으로 캐릭터간 성능을 맞추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사실 개발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직업 내 덱 테마마다 기대 성능에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가지 전사 혹은 와쳐의 추월마요인데, 솔직히 거듭 얘기하지만 싱글 플레이어 게임이기 때문에, 문제라 하기에도 뭐하다. 고승천으로 갈수록 덱의 컨셉이 수렴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깔끔하게 잘 만든 게임이다. DLC 여럿 나오면서 유물이나 카드가 3배 4배 늘어날수도 있는 포맷인데, (보드게임 확장팩마냥), 그런거 없이 깔끔하다. 조작은 매우 간편하고 직관적이다. 입문하기도 쉽다.
딱히 혹평할 부분이 없다는 감상이다. 그림 취향에 있어서는, 사실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깔끔해서 괜찮긴 하다. 음악도 괜찮고. 반복적이지만.
여러번 플레이하기 좋은 게임이다. 좋은 로그라이크의 조건을 만족한다. 하지만 또 사실 매 판이 '엄청' 새로운 게임은 또 아니라서, 60판쯤 하면 볼장 다 봤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정도면 돈값은 하고 남는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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