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썸네일만 보면 참 하기 싫은 게임이다. 인게임 그래픽은 모르고 썸네일만 먼저 봤으면 이거 안했다. 게임 내 전투 화면의 도트 그래픽은 꽤 매력적이었다. 개발중인 이 게임을 처음 본 것은 또 오래 전의 일이다. 5년은 됐다. ikenfell의 킥스타터 모금은 2016년에 마감되었다.
크라우드펀딩이 끝난 뒤 달리 어떤 방법으로 개발 자금을 충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난 2020년 4분기에 발매되었다. 퍼블리셔로 험블 게임즈를 끼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발 과정에서 다소 난항을 겪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지던 게임이 험블 퍼블리셔의 도움을 받아 어찌저찌 출시하게 되었다는 시나리오를 이전에 몇번 볼 수 있었다.)
도트 그래픽이 매력적인 이 게임은, 간단히 장르로 얘기하자면 쯔꾸르 RPG다. 월드 맵과 전투 화면이 구분되며, 월드 맵을 돌아다니다가 심볼 인카운트를 통해 전투 화면으로 전환되는 식이다. 개별 유닛 속도 기반의 턴을 진행하고, 액션 커맨드를 사용한다. 몇가지 고전 RPG의 시스템, 디자인, 방향성 등이 연상되는 게임이다...
여기서 액션 커맨드란, 기본적으로는 커맨드(행동)을 입력하면 캐릭터가 그대로 수행하지만, 타이밍에 맞춰 추가로 버튼을 누르고, 그 타이밍이 정확했느냐에 따라 커맨드 위력이 달라지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은 마리오 RPG 시리즈, 구작 페이퍼 마리오 시리즈에서 채용된 바 있다.
은근 어렵다
그리고 이 전투와 축을 이루는 게임의 핵심은 서사다. ikenfell에서 눈에 띄는 소재는 사실 조금 당혹스러운(재미없는,이상한) 것으로, 소재의 바탕은 비록 사랑(친구간의, 가족간의, 애인간의) 이라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발현은 게이, 레즈, 논바이너리 등의 특이한 유형으로 표현되는데, 과연 인디 게임이군, 하는 감상이 절로 나왔다.
그놈의 젠더 관련은 미뤄두고, 이 게임은 연락이 끊긴 언니를 찾아 ikenfell 이라는 마법학교를 찾아온 여동생의 이야기이다. 언니는 가족을 떠나 ikenfell에서 수학하며, 방학마다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돌아오지 않았고 편지도 없었던 것이다. 동생 Maritte는 지금까지 마법의 재능과는 연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언니 Safina를 찾아 ikenfell로 찾아오는 길에, 강력한 화염 마법을 갑작스럽게 각성하게 된다.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
이켄펠은 개인의 비밀과 약점, 그것의 해방과 공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비밀주의사 사피나(언니)는 그 성향 탓에 다소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주변과 마음을 터놓은 마리트(동생,주인공)은 갖은 난관을 우정 파워로 헤쳐나간다.
처음엔 단순히 가족애에 대한, 다소 고리타분한 가치를 전하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개인의 회복과, 연결, 혹은 관계성이라는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하이틴인 까닭에, 청소년 소설같아서 잘 어울리기도 한다.
동시에 비밀과 상처의 공개, 회복이라는 면에서 호응하는, 동성애(논바이너리)라는 소재가 게임 전체에서 굉장히 부각된다. 스토리 면에서 동성애 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모든 메인 캐릭터들 중에 둘을 빼면 전부 게이 아니면 레즈, 그리고 게이도 레즈도 아닌 무언가다. 당황스럽게도 캐릭터 스탯창에 인칭대명사까지 적어두었다.
감도나 개발도같은게 적힌 야겜 스탯창이 생각난다
이런 소재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으나, 논바이너리 요소가 핵심 서사보다 너무 눈에 띈다. 이것이 바르던 바르지 않던,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라는 것, 그점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다시 말하지만 캐릭터 스탯창에 인칭대명사가 적혀있는건 정말 이상했다.
다소 희한한 부분은 있지만, 이러저래 재미있는 이야기, 주제, 배경이 장점이다. 젬나좋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혹은 마법사가 동성애자인건 어쩔 수 없지~ 하는 식으로 넘길 수 있다면, 꽤 괜찮다.
퀴어 요소만 보면 이게 대체 뭔가 싶지만, 그 밖의 부분들도 의외로 세심하게 잘 만들어져있다. 특히 전투 시스템의 짜임새가 안정적이다. 시스템의 틀 자체는 앞서 언급했듯 액션 커맨드로, 고전 RPG에서 가져온 시스템이지만, 몇가지 전략적인 어레인지가 있다.
3인 전투 고정
전투 화면의 맵은 3x12의 타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2-3칸정도 상하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 모든 공격과 행동엔 고정된 효과범위가 있어, 이것을 의식하고 움직이게끔 만들어뒀다. 공격 자체의 유형도 다양하다. 단일 타겟, 횡열 광역, 가장 가까운 적을 공격하는 공격 등. 공격 스킬마다 성공시켜야 하는 액션의 갯수가 조금씩 다른데, 스킬의 명중률이 따로 없는 대신 여기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다만 3x12라는 그럭저럭 넓은 맵을 사용하는데 비해, 지형지물은 따로 없다. 전투 지역에 따라 전투 화면의 배경이 바뀌긴 하지만, 이동 범위라던지, 특수 타일이라던가는 없다.
대신 등장하는 적의 종류가 아주 많다. 지역마다 몬스터 출현군이 다 다르고, 지역 내 출현 패턴도 여러가지다. 몬스터마다 공격, 행동패턴이 다 달라서 지루하지 않다.
설치나 예측, 사거리 등을 이용한 전략적인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지역별 특징이라던가, 적 상성이라던가 할만한 것은 따로 없다. 꽤 간단한 편. 그런고로 자체 전략이 일단 정착되면, 참전 캐릭터를 굳이 바꿀 이유가 없어진다. 덕분에 참전 가능 캐릭터는 6명이나 있는데 비해, 활용성은 부족한 느낌이다.
전투 방식에 크게 영향을 주는, 변수라고 할만한 요소는 따로 없으며, 반복적이고 느리지만, 등장하는 몹이 계속해서 환기되는 덕에 꽤 재미있다.
리듬감 있는 전투. 못버틸만큼 지루하진 않다
레벨 스케일링을 안한다. 지역 진행에 따른 몹 스펙업만 있는데, 진행이 얼추 부드럽다. 근데 이건 마주치는 심볼 인카운트를 전부 죽였을 때의 경우라서, 일부 스킵하는 플레이어의 경우 다소 레벨 노가다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스탯의 성장 역시 꽤 매끄럽다. 진행하다보면 레벨이 오르고, 스탯이 오르고, 내 스탯이 오르는만큼 적들 스탯도 오르는데, 주고받는 데미지 역시 지나치지 않은 수준에서 같이 오른다.
감명받은 것은, 시작 체력이 20인데, 엔딩보는 시점에서의 체력이 고작 50정도에 불과하는 점이다. 숫자로 지랄을 안한다. 너무 좋다. 그러면서도 주고받는 평균 데미지/체력은 어느 레벨 시점에서든 비슷하다. 몹이 항상 2방 아니면 3방컷 나온단 뜻이다. 레벨업이 무용하다는 생각도 잘 안든다.
장비에 대해서는, 드롭되는 장비도 있지만, 상점제 장비가 더 좋은 경우도 많다. 특히 무기는 티어가 오를 때마다 상점에서 새로 사야한다. 상점에서 장비를 사자마자 더 좋은템디 바로 드롭된다거나 하는 배려 부족한 일은 거의 없다. 장비나 소모 아이템 구입에 필요한 돈도 항상 아슬아슬하다. 수치 조정이 잘 된듯.
맵 넘어갈때마다 장비를 바꾸는 기분
필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비가 굉장히 많아서 즐겁다. 잡은 몹이 드롭하는 경우보다는 맵에 숨겨진 상자, 혹은 비밀 방에서 발견하게 된다.
다만 장비가 제공하는 스탯의 비교에 대해서는 다소 직관성이 떨어진다. 장비는 스탯 제공량을 따로 표시하지 않고, 장비 변경 화면에서 현재 장비와 비교했을 때 가감되는 수치만 표시해 주는데, 일일히 확인하기 귀찮다.
OST 작곡팀이 꽤 유명하다. aivi & surasshu 라는 이름의 남녀 부부 듀오다. 스티븐 유니버스 시리즈의 사운드트랙도 만들었다고 한다. ost의 품질은 엄청 좋은데, 가사가 들어간 곡들은 뭔가 좀 부담스럽다.
내 파티원 얘로 좀 바꿔줘
이하 스포일러 겸 총평. 평소에 이런 배려는 전혀 안 했지만, 예민한 사람은 넘기시오.
참, 뭐라고 해야할지. 자신의 비밀이나 약점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혹은 성 정체성 같은 것들, 내밀한 것들을 공유하는 것들을 꽤 아름답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놨다. 내세울만한 가치가 있는 표제이긴 하지만. 이게 정말 최선일까? 동시에 젠더, 오히려 젠더 부분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기존의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들이 흐려지고, 분위기상, 마치 논바이너리는 정말 좋아~ 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게다가 최종보스가 게이다. 그래서 더 눈에 띈다. 서사적으로 그 인물이 왜 최종보스가 되었는지, 그 인물의 애인의 행동들이 게임의 핵심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이해가 가지만, 게이 커플이 게임에서 한참 등장 안하다가, 애인의 죽음으로 게이 파워에 눈을 떠서 게이 최종보스가 된다. 뭐 어쩌라는 건가? 그리고 보스전도 드럽게 길어서 질린다.
일부 당황스러운 구석만 빼면 꽤 할만한 게임이다.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뭔놈의 소수성애자가 하도 많아서 부담스러울 뿐이지. 앞서 얘기했듯 전투쪽도 엄청 괜찮다. 근데 조연 캐릭터들은 다 꽤 이쁜데, 파티에 데리고 다니는 메인 캐릭터들 몇명은 생긴게 좀 이상하다. 주인공이 이뻐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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