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잉태되었지만, <고양이 형태>로 태어난 쟈리 다크는, 그에게 거처를 보증해 주었던 이 우주 어느 곳에서도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축복으로 볼지 저주로 볼지는 당신의 자유이다.
레트로한 픽셀 아트가 유행이라고는 하나, 그것의 제작 공정까지 레트로한 사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이는 것이 픽셀 그래픽, 혹은 "픽셀 그래픽인 느낌" 만 있으면 게이머들에게 별다른 반발 없이 그럭저럭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그러한 시류 속에서, 작업 도구들의 접근성이 개선되고, 작업자들의 평균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인디 도트 그래픽의 비주얼적 성취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여러 개발자(개발팀)들이 이러한 성취를 바탕으로 트레일러를 발표하고 게임을 내었는데, 개중에서도 주목받은 타이틀들이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는 중국 Pixpil의 Eastward나, 영국의 The Last Night가 이름을 알렸다. 카타나 제로는 3D를 부드럽게 섞어 사용했으며, SIGNALIS, 망했지만 리뷰도 쓴 Pathway, 인디는 아니지만 스쿠애니의 옥토패스 트래블러도 이목을 끌었다. 나리타 보이 역시 이런 게임들 중 하나다. 내 생각에, 나리타 보이는 도트 텍스쳐를 이용한 화면 연출의 첨단에 있는 동시에, 집대성이다.
개발사 스튜디오 코바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인디 사이즈의 회사다. 대표가 멕시코 사람인데, 도쿄에서 몇 년 일하다가 스페인에서 스튜디오를 차린 모양이다. 2016년에 킥스타터에서 나리타 보이의 크라우드 펀딩을 성공시켰고, 21년 출시했다. 개발 기간이 다소 길어지긴 했으나, 5년 끌어놓고 무사 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어떤 분위기의 게임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세계물같은 시작
나리타 보이는 일단 비주얼만으로도 먹고들어가는 게임이지만, 장르는 사이드스크롤 액션 어드벤쳐 게임이다. [나리타 원]이라는 가상의 콘솔 속 게임의 세계로 들어가, THE CREATOR와 TRICROMA를 숭배하는 사이버 세상을 탐험하고 구원하는 이야기이다. 라고는 하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탐험이라기보다는 관광이고, 자유로운 탐색은 불가능하다. 어드벤쳐라기보다는 JRPG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킥스타터나 상점 페이지를 비롯한 외부 홍보 지면에서는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탐색" 이나 "숨겨진 비밀" 같은 키워드를 사용하는데, 이런 것들은 다 공수표다. 일자 진행이고, 딱히 숨겨둔 것도 없다.
게임의 실제 플레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지금은 우선 시나리오와 게임을 구성하는 비주얼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시대적 배경은 1980년이다. [나리타 원]이라는 가상의 콘솔과, [나리타 보이]라는 가상의 게임을 만든 THE CREACTOR라는 가상의 인물이 있다. 머리가 벗겨진 이 인물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는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여느 때처럼 자택에서 콘솔을 두드리며 일하다가, 화면에서 튀어나온 사이버 세상의 주민, HIM에게 공격당해, 기억을 잃고 만다. HIM은 [나리타 보이] 세상의 유력자로, 시뻘겋게 차려입은 본작의 대악당이다.
THE CREATOR가 기억을 잃은 탓에, 그의 관리를 벗어나게 된 [나리타 보이]의 세상은, 정복군주 HIM에 의해 차례차례 습격당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HIM이 [나리타 보이]의 세상을 완전히 점령하게 되면, 침략자 HIM의 마수는 현실 세상을 향할 예정이다.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리타 보이]의 주민이자 관리자 프로그램인 [MOTHERBOARD]는 HIM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할 영웅, "나리타 보이"를 현실 세상으로부터 불러오기로 하는데, 그렇게 소환되어 [나리타 보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플레이어 캐릭터, "나리타 보이"이다.
아저씨의 기억을 되찾아주자
빨간 애들도 죽이자
이 게임의 핵심 서사는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메인스트림, 주인공이 "나리타 보이" 게임 세상을 구하는 여정이며, 나머지 하나는 서브스트림, THE CREATOR의 과거 이야기이다. 전개 순서는 순차적이다. "나리타 보이"는 THE CREATOR가 기억을 되찾아, HIM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게임 세상에 남겨진 THE CREATOR의 기억을 하나씩 모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과거가 조금씩 풀린다. 게임 진행이 선형적이기 때문에, 이야기간의 전환에 제법 리듬감이 있다.
시나리오는 다소 보편적이고 뻔한 주제의 이야기를 보편적이고 뻔한 방법으로 전달하는데, 완성도가 아주 좋다. 전체적인 구조, 각 상황의 화면, 색채구성에 있어서의,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계획이 아주 체계적이다. 만족감이 상당하다.
사이버 세상의 배경은 기본적으로 어둡고, 종종 강렬한 고명도 고채도의 원색을 하이라이트로 사용하는 것으로 화면이 구성된다. 발광하는 격자 그리드, 우주왕복선마냥 복잡한 벽면, CRT모니터와 고전 콘솔풍 텍스트박스 등의 소재에서 미루어볼 수 있는 비주얼 모티브는 명백한 신스웨이브다. 80년대 비디오 게임이나 영화에 대한 복고를 주제로 하는 장르인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밝으며, 비너스상 따위가 오브제로 등판하는 베이퍼웨이브랑은 또 조금 결이 다르다.
어둡고 신비로운 사이버 세상의 관광은 대단히 즐겁다.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은 좁지만 모든 맵이 개성적이다. 사이버 세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매우 흥미롭다. 단 한순간도 배경이 지루하지 않다. 슬쩍 보고 지나가는 모든 화면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경악스러울 수준이다. 화면 구성에 있어, 픽셀 텍스쳐를 이용한 연출 역량이 대단하다. 색수차 효과가 들어간 인게임의 모든 화면은 갖가지 사이즈의 픽셀 텍스쳐를 여럿 조합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기본 텍스쳐의 질이 수준급이다. 또한 도트를 사용하면서 비트믹스를 감수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화면이 못생겨지고는 하는데, 각진 픽셀 경계를 색수차 효과와 블러를 넣는 것으로 중화시켜, 참으로 봐줄만한 그림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종종 눈이 너무 아프다. 게임을 실행할 때 경고문이 떠서, 조명 효과 때문에 눈이 아플 수 있음을 알린다. 나는 의례로 하는 경고인 줄 알았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진지하게 이거 하다가 몇 명 기절했을 것 같다. 게임의 신스웨이브 풍 분위기를 위해, 알면서 넣은게 아닌가 의심된다. 나도 하다가 편두통이 와서 중간에 한 번 끊었다.
프레임 단위로 점멸한다. 제정신인가?
멋은 있는데, 가끔 번쩍번쩍이 너무 과하다
한편, THE CREATOR의 과거 회상을 다루는 부분의 색조 구성은 사이버 세상에서와는 사뭇 다르다. 톤이 살짝 섞인 무채색으로 싹 밀었다. 배경과 인물은 모두 정적이고, 대비는 덜하고, 살짝 밝으며, 때문에 발광 효과도 덜하다. 화려한 액션과 연출로 이루어진 동적인 사이버 세상과의 낙차가 굉장히 강렬하다. 앞서 얘기했듯 다소 보편적이고 뻔한 주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미스터리하고 환상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사이버 세상에서 잠시 돌아와, THE CREATOR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 몰입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THE CREATOR의 과거 부분과 비교해, 사이버 세계의 스토리는 실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피상적인 디테일이나 시각효과는 출중한 데 비해, 내용 면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사이버 세상 등장인물들의 외형적 개성은 아주 흥미롭지만, 등장인물로서의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하며, 게임의 멋있는 소품에 불과하다. 이렇다 할 갈등 관계가 없다. 내면의 묘사도 없다.
[나리타 보이]의 사이버 세계는 살아있고 탐험할 수 있는 하나의 세상이라기 보다는, THE CREATOR의 상상 속 세계, 혹은 내면세계의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게임의 핵심적인 서사나 와닿는 것이 있을만한 내용은 전부 THE CREATOR의 과거 회상 부분에 묶여 있다. 과거 부분을 특히 잘 만들어둔 탓에, 더욱이 플레이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이버 세상의 탐험은 과거 회상의 종속물에 불과하며, 단지 청명하고 아름다운 과거 회상 파트와의 대비효과를 위해 마련된 화려한 노이즈처럼 느껴진다.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데, 여기도 꽤 멋있게 만들어놨다
어드벤쳐 게임으로서의 나리타 보이는 아쉬운 요소가 많다. 돌아다닐 수 있는 지역의 절대적인 넓이가 좁다. 게임 진행에 따라 마치 메트로베니아인 척, 새로운 이동 능력이 하나둘씩 추가되지만, 본질적으로는 벨트스크롤이다. 애초에 이미 지나온 지역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디지털 세상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라며 종용하지만, 막상 그러고자 하면 할 수가 없다. 파헤칠만한 비밀이 극소량이라 오히려 다행이다!! 월드맵이나 미니맵은 당연하다는 듯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의 액션, 전투는 그냥저냥 괜찮다. 애초에 내 요구치는 높지 않았다. 여러 기술이 차례대로 해금되어, 게임패드 버튼을 전부 다 사용하게 되고, 조작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캐릭터를 자유롭게 강화하거나 할 수는 없고, 본격 액션 게임으로서의 깊이는 없는 것 같지만, 나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구색은 하는데, 액션이 장기인 게임은 아님
게임의 사이즈에 비해 적의 종류, 전투 패턴이 다양하고, 보스전도 잦다. 하지만 보스전의 완성도에 비해 체감되는 길이가 살짝 길었다. 보스의 패턴은 대개 3-4종이고, 여기 피격당하지 않으며 딜을 누적시키기 위해서는 가벼운 기술을 위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데, 이러면 쓸만한게 평타밖에 없고, 보스의 피통은 크기 때문에, 단조로운 주고받기가 한세월이다.
번역의 상태는 구리다. 게임의 영문 폰트는 UI에 맞춰 픽셀 풍인데 비해, 국문 폰트는 특색없는 바탕체다. 번역의 품질이 낮은 것은 기본이고, 자간이 엉망인 것은 덤이다. 구글 번역은 아니고, 직업 번역가가 붙기는 한 것 같은데, 상당히 불만족스럽다.
당체 뭔 소린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른세상 말인가 싶어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
나리타 보이의 비주얼은 유사품들 가운데 정점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막상 게임으로서는 미묘한 부분이 좀 있었다. 게임 전체적으로, 일회성 연출, 일회성 이벤트, 맵이 너무 많다. 그런 개별 이벤트에 내실이 있냐면, 그건 또 아니다. 그런데 막상 화면은 이뻐서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게임의 다른 부분들이 훌륭한 비주얼을 따라가지 못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는 것은 가치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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