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륜의 위치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주위를 에워싼 둘레 이백 야드의 장막 너머로는 갈 수가 없었던 거야. 똑바로 걷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데도, 결국은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돼.
어떤 의미에서 내 자식들은 삼림 지대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흐르는 시냇물에 장난감 배를 흘려 보냄으로써, 내가 할 실험을 대신 해 줬다고도 할 수 있다. 현실상의 거리는 1마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배가 외부의 영역들을 돌파하는 데는 6주나 걸렸다.
루프 히어로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의 면면은 얼마간의 인디게임 씬에서 흔히 보아왔던 상투적인 것들이지만, 그들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게임, 루프 히어로는 대단히 각별하다. 외장을 이루는 DmitryDeceiver의 픽셀 아트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 게임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품지 않고 있었으나, 직접 얼마간 해 본 결과, 루프 히어로는 그래픽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일단 확실히 하자면, 비교적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루프 히어로는 번뜩이는 타이틀이 맞다.
게임의 개발사 Four Quarters는 러시아 소재의 회사이다. 이전에 출시한 타이틀로는 "Please, do not touch anyThing"이 있는데, 이건 안 해봤다. 인방에서 많이 했었던 것 같음. 개발사는 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트위터에 전쟁 반대 메시지만 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어, 사람들이 기대하는 루프 히어로의 업데이트 계획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차기작 개발 소식도 마찬가지. 근데 이 개발사가 평소 외부 인터넷 경유의 소통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긴 하다.
루프 히어로를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 지칭어는 많다. 그러나 한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로그라이트이다. 카드 덱을 만드는, 덱 빌딩의 요소도 섞여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카드 게임이기도 하다. 더 큰 이득을 보기 위해 지형지물을 섬세하게 배치해야하는 시티 빌딩 게임이기도 하고, 비교적 새로운 장르인 오토배틀(류) 라고도 말할 수 있다. 거칠고 광의적으로는 RPG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저런 특징들을 절묘하게 짬뽕해놨으면서도, 게임 플레이 면에 있어서는 상당 수준의 완성도를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 이 게임의 보기 드문 덕목이다. 두개 섞기도 제대로 못 하는 게임들이 태반인데, 이건 서너개가 섞였다. 그래서인지 좀 짧다. 유일한 흠이 있다면 그것이다.
러시아 개발사라 고생이 좀 있는 모양
주인공 캐릭터는 유아론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별과 태양이 사라지고 하늘이 사라지고, 지형과 생물도 사라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황량한 도로를 끊임없이 원주한다. 기억을 잃고 방랑하는 주인공은 어쩌다가 슬라임을 조우하게 되는데, 이를 쓰러뜨리면 기존의 세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돌아옴과 동시에, 배치할 수 있는 카드로 손에 들어온다. 카드라는 이름의 지형을 배치하면, 관련된 새로운 적들도 출현한다.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루프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임은 로그라이크이며, 여러 세션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한 세션을 시작하기 전에, 해금되어 있는 여러 지형 카드를 골라 덱을 만들어 진입한다. 그 세션에서는 미리 고른 카드들만 드롭된다. 지형 카드를 원하는 곳에 배치하면 표기된 효과를 얻는다. 일부 지형 카드의 배치엔 규칙이 있으며, 일부 카드는 서로 인접해서 배치했을 때 변화하여 특수한 보너스를 얻는다. 물론 보너스가 아니라 패널티를 받을 때도 있다.
세션을 반복해서 돌다 보면 이런저런 자원이 들어오는데, 죽지 않고 세션을 이탈하면 이것을 피난처 캠프로 가져올 수 있어, 자원을 소모해 캠프의 건물을 올리고 캐릭터의 영구적인 강화를 꾀할 수 있다. 이러한 강화의 예로는 다음이 있다. 체력이 낮아지면 자동적으로 소비되어 HP를 회복시키는 포션이 해금되고, 회복량과 보유 상한이 높아진다. 루프의 시작 지점에서 캐릭터를 지원 사격해주는 감시탑을 복수 지을 수 있다. 다른 클래스를 해금시켜주는 건물도 있고, 캐릭터를 한 번 부활시켜주는 건물도 있다. "보급품"을 복수 세팅해 추가적인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다. 그 밖으론 로어나 기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백과사전"도 게임의 진행에 따라 해금된다.
한편 다시 전투로 돌아가면, 맵에 세팅된 타일에 따라 정해진 몹이 일정 시간 주기로 스폰된다. 조우했을 때 시작되는 전투는 완전히 자동적으로 치러지며, 쓰러뜨릴 경우 지형 카드, 자원과 함께 장비가 드롭된다. 드롭되는 이런저런 장비의 스탯 옵션을 비교해볼 수 있으며, 인벤토리에서 드래그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현재 장비와 교체할 수 있다. 여러 세션에 걸쳐 캐릭터와 야영지를 강화하고, 지형을 적절하게 배치해 최종 보스까지 잡으면 게임 끝이다.
직접 만든 맵에서
자동으로 싸운다
루프 히어로는 기존의 여러 인디 게임들에서 보아왔던 요소들이 분해된 뒤 재조합된, 꽤 독특한 게임이다. 눈에 띄는 여러 장르 요소들, 덱 빌딩, 레벨업, 스킬, 장비, 시티 빌딩 등, 로그라이트까지, 이들이 빈틈없이 용접된, 완성도 높은 게임이다. 인게임 화면만 띡 보면 이게 뭔가 싶지만, 실제 해보면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는데,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루프 히어로의 플레이타임은 로그라이트라는 범주에 대해 기대되는 수준에 비해 짧다. 매 세션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변수의 가짓수가 우선 적어, 다양한 상황이 잘 나오지 않고, 고민할만한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우선 세션에 진입하기 전에 미리 덱을 짜고 들어간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면, 여타 CCG와 비슷한 부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 유희왕이나 하스스톤같은 경우, 같이 플레이하는 상대가 서로 다른 구성의 덱을 들고 옴으로서 매 플레이 세션의 다양성이 확보된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루프 히어로는 혼자 플레이하는 게임인 데다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직접 만든 덱에 따라 좌우된다. 이것은 재미있는 아이디어이고 경험이긴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양한 변수가 창출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선택한 클래스와 보급품에 따른 유불리를 따져 덱을 구성한다. 몇 번만 해 봐도 정답이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사실 루프 히어로를 덱 빌딩 게임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씀이다. 하스스톤 랭겜을 덱 빌딩 게임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르기도 하나? 모르겠다.) 인게임 세션 내에서 덱이 실시간으로 구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반면 시티 빌딩이라고 하면 조금 더 와닿는 것이 있다.
시티 빌딩 게임. 사실 루프 히어로를 두고 시티 빌딩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살짝 어폐가 있겠으나, 이 게임을 설명하고자 할 때 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션 진입 전 구성한 카드풀에 기반하여, 랜덤 드롭되는 카드들은 배치되면 적을 스폰시키고, 다른 기능을 하거나, 캐릭터 스탯을 높여준다. 특정 카드들을 인접시키면 보너스나 디메리트가 발생한다. 지형을 섬세하게 배치해, 더 수월하게 몹을 상대할 수 있도록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끔 설계하는 것이 루프 히어로의 핵심적인 플레이다. 물론 루프 히어로는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게임이니만큼, 마을을 운영한다던가 하는 요소는 없지만, 재미를 만드는 기본 요소들의 구성과 작동 원리는 시티 빌딩 게임과 상동하는 점이 많다.
로그라이트 요소가 결합된 시티 빌딩 게임이라고 하면 최근 이목을 끌었던 타이틀 중에는 Against the storm과 비슷하다고 들어볼 수 있다. 지만 출현하는 카드를 비롯한 상황적 다양성은 결국 세션 진입 전 덱 빌드 과정에서 종결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아쉽다.
무한 루프를 한 번쯤 만들어보면 더 할 게 없다.
비교적 장고해야 하는 상황은 다름아닌 장비 교체 시에 발생한다. 우선 전투의 경우, 출현하는 여러 몹들은 선택한 액트(액트는 4장까지 준비되어 있는데, 각각 다른 보스가 출현하고, 후반 액트의 적일수록 스탯이 더 좋다.)에 따라 개체별로 정해진 0~3가지 스킬을 갖추고 나오는데, 여러 스킬을 갖춘 몹들이, 플레이어의 각 클래스에 대해 명확한 상성관계를 이뤄, 선택의 제한을 만들긴 하지만, 애초 애매하거나 불리한 경우, 덱에서 빼거나 조우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니, 이와 관한 전투 전략의 고민 역시 덱 빌드 시점에서 끝나는게 일반적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대개 플레이어의 실수이며, 다음 세션에서는 반복되기 어렵다.
다시 장비 교체에 관한 얘기로 돌아와, 장비가 제공하는 능력치라는 것은 대체로 효용을 파악하기 뭔가 애매한 형태로 표기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방어력(들어오는 피해량에 대해 감산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회피율, 반격률, 반격 데미지(반격시 합산되는 데미지가 아닌 것 같다.) 소환 품질, 해골 레벨 등. 이러한 스탯의 효율은 또한 세션 진입 전 고른 보급품, 게임 중 출현한 특성 등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결국 대강 보고 뭔가 좋아 보이는 것을 고르게 된다. (사실 그렇게 대강 골라도 게임은 깰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지 않게 되는 것도 있다.)
개발자들의 정확한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루프 히어로의 반복 플레이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바랬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효율과 미관을 고려해 맵을 배치해 나가는 과정은 재미있으며, 유니크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게임의 정답이 상당히 뚜렷하고, 경험적인 변수가 적으며, 빠르게 쉬워진다.
자세하게 언급은 안했지만 레벨 업 시 찍는 특성도 쓰이는 것만 쓰인다. 20루프쯤 되면 더 이상 맵에 타일을 배치할 공간이 없어, 캐릭터의 성장이 한계에 달한다. 이 시점까지 무한 루프가 가능하게끔 맵을 디자인하거나, 승리하고 후퇴하는 것의 반복이다.
짧아서 아쉽긴 하지만 재미없어서 아쉽진 않았다. 특히 그래픽은 눈이 부신데, 최단입점으로 화면을 확대하기만 하면 "도트 감성"이 완성되는 줄 아는 일부 개발사들과는 딴판이다. 음악도 괜찮고 백과사전의 로어도 소소하게 재미있다. 굳이 누군가에게 게임을 추천해야 한다면 추천할 만 하다. 개발자들의 다음 게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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