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부여하길 원한다면
고통 받는 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고통 없이는 삶도 사랑도 없다.
고백한다. 세계 1000등의 벽은 높았다. 그래서, 고지에 오르기 직전이었던 나는 여지없이 굴러떨어졌다. 이번엔 그래도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죽었으니, 이 또한 새로운 발견이며 다음을 위한 디딤돌이라 할 수 있겠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이번 실패로 약 2주간의 여정이 무위로 돌아갔으나, 이전보다 더 높은 경지에 닿았음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번 캐릭터가 죽기 전날, 보이드 활을 주워먹는 것에 성공했는데, 이는 분명 괄목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렐름 오브 더 매드 갓에서 1000등 찍어보기는 일종의 개인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능선 위의 종교적 사적지를 순례하는 산지민과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는 개인적인 낭만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단지 매년 꼴사납게 죽고 컴퓨터 앞에서 몸을 잠깐 배배 꼬은 뒤, 하루쯤 무기력해지는 것의 반복일 뿐이다.
이전에 렐름 오브 더 매드 갓에 대한 리뷰를 두어번정도 썼다. 카밤에서 데카로, 운영사가 이전되기 전, 플래시 클라이언트 시절에 한 번 썼고, 작년 즈음의 미니리뷰에서 한 번 다뤘다. 그 시점엔 이미 유니티 엔진으로의 이식이 완료되었다. 이번에 새로 보게 된 큰 차이점은 게임 시즌제가 도입되었다는 것인데, 먼저 얘기하자면 이것은 긍정적인 부분이 크다. 시즌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나중의 단락에서 다룰 것이다.
게임 잼 출품작으로서 시작
그 전에, 렐름 오브 더 매드 갓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이 게임은 스팀 기준 2012년에 출사표를 던진 레트로 그래픽 MMO 핵앤슬래시다. 게임은 2009년 경 TIG 소스에서 개최된 게임 잼 Assemblee Competition에서 기원한다. 이 잼은 1차 과정과 2차 과정으로 나뉘었는데, 1차 과정에서는 잼에 쓰일 리소스의 경연이 열렸고, 여기에서 뽑힌 에셋이 Oryx의 Lo-Fi Fantasy Tileset이다. 2차 과정은 짐작되다시피 1차에서 뽑힌 리소스를 기반으로 게임을 만들어 경연하는 것 이었는데, 렐름 오브더 매드 갓이 3위로 랭크인 한 것을 볼 수 있다. 개발자들은 리소스의 상업적 사용권을 구입해 게임을 정식 출시했다고 wiki에는 적혀 있다.
이후 긴 시간동안 이 게임에는 두어번의 운영사 이전이 있었고, 가장 최근에 서비스를 이어받게 된 것이 DECA인데, DECA가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오래된 게임을 개선시켜 수익구조를 탄탄히 하는 것을 전문으로 삼는더랬다. 말하자면 DECA는 일종의 게임계 사모펀드를 자처하는 것이다. 옛날 게임들 긁어모오다가 유통하는 NightDive Studio(최근에 시스템 쇼크 리메이크를 냈다) 가 연상되는 사례다. 게임업계라는 얼핏 좁아보이는 시장에서 이러한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나로서도 참 궁금하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보지 않을 것이다.
DECA가 ROTMG를 이어받은 후, 이들은 주목할만한 결과를 냈다. 첫째는 플래시에서 유니티 엔진으로의 이식을 별 잡음 없이 마쳤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과정에서 기존에 판치던 핵이 대량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또한 이전 개발사 시절보다 컨텐츠 업데이트가 빈번하며, 기존 게임 내용에 관한 개선사항도 많아(던전마다 다른 ost가 새로 들어간다던지), 이미 10년된 게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플레이어 감소세가 대단히 안정적인 형국에 들어섰다.
살짝 늘어난 채로 유지중이다
이전에도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 렐름 오브 더 매드 갓이라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온라인 핵앤슬래시 게임인데, MMO의 현장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간단한 그래픽이 암시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게임성이 특징이다. 모든 캐릭터가 예외없이 퍼마 데스라는 준칙 아래 놓이며, 캐릭터가 죽으면 그 캐릭터의 성장 상태에 따라 다른 크기의 묘비가 필드에 남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묘비에 한 번씩 조의를 표하는 것이 모든 캐릭터의 결말이다. 죽은 다음의 다른 캐릭터에게 직접 계승되는 것은 창고에 남겨둔 아이템밖에 없다. 이러한 특징은 게임의 출시 당시에 이미 정해져, 지난 십 년간 크게 변한 것이 없다.
20개 이상의 클래스 중에서 하나를 골라, 탄막 형식의 전투를 거쳐 캐릭터를 성장시킨다. 캐릭터는 기본 공격과 1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으며, 클래스마다 허용된 장비를 4개까지 장착할 수 있다. 캐릭터의 능력 구조에 대한 세부 커스터마이징은 불가능하고, 레벨 업이나 스탯 포션을 이용한 스탯 성장만 할 수 있다. 필드에서 등장하는 적들도 모두 탄막으로 공격한다. 탄막 중에는 쉬운 패턴도 있고 어려운 패턴도 있는데, 탄막의 비거리가 짧은 것을 근접 공격이라 하고, 긴 것은 원거리 공격이라 한다. 따라서 칼 든 캐릭터가 공격하면 짧은 검기를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렐름의 필드라는 것은 "렐름"이라는 일종의 거대한 인스턴스 던전으로, 지역열 서버와는 별개의 개념이며, 서버의 현재 인원수에 맞춰 여러 개의 렐름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한다. 하나의 렐름에는 여러가지 강하고 약간 필드 보스들이 출현하고, 이들이 모두 쓰러지면 필드의 플레이어들은 최종 보스 "Mad God"의 던전으로 전송되는데, 이 과정에서 렐름은 초기화되어 환경이 일신된다.
욕망은 환유, 주체는 결핍
"Mad God"의 던전이 아니더라도, 필드의 일부 몹들은 죽으면서 때때로 관련 하위 던전의 포탈을 드롭한다. 이러한 던전들의 루팅 기대치가 필드보다 높기 때문에, 렐름의 파밍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던전을 반복해서 도는 행위로 갈음되며, 일부 필드 보스로부터 드롭되는 던전은 기대 드롭이 훌륭한 동시에 극단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엔드 게임 컨텐츠로서도 기능한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장소에서도 플레이어 캐릭터는 퍼마 데스라는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템이 드롭된다고 한들, 죽으면 끝이니,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촉이 오면 즉시 단축키를 눌러 집(넥서스라는 명칭의 광장)으로 갈 수 있다. 탈출에 대한 비용이나 패널티가 없으니, 현재 상황의 위험성만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만 갖추면 살 수 있다. 물론 그 판단이 늦어 묘비를 세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이 게임에서 보이는 협동 플레이의 형태는, 난관의 극복과 성과의 극대화를 위한 팀 플레이라기 보다는, 리스크의 단순 최소화에 목적을 두는 것 같다. 물론 일부 캐릭터는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이런저런 유용한 버프를 주거나 힐을 주거나 할 수는 있지만, 상위 던전으로 갈수록 적의 탄막은 플레이어를 관통하는 경향이 있어, 튼튼한 캐릭터가 힐러를 지켜주거나, 장판을 밟아주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죽기 싫어서 뭉쳐 다닌다는 감각
물론 극악 엔드게임 던전의 경우 보스 패턴의 숙지가 필요한 것과, 시스템적인 딜컷으로 인해, 어느정도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좌우간에 안되겠다 싶으면 레이드고 뭐고 각자도생으로 줄행랑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와우마냥 막공 갔다가 빤쓰런한다고 대단히 큰 질책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 최상위 던전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보통의 MMO보다 레이드 접근성이 좋은 것도 있다. 여하튼 상기하듯 보신적인 태도가 통용되는 것은 물론 퍼마-데스라는 게임의 기본적인 특징에 기인한다.
이처럼 퍼마-데스 바탕의 디자인은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인데, 극히 세심한 컨트롤과 성장 수준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엔드 게임에 대한 접근성이 굉장히 높다. 대신 통상 MMO에 기대되는 수준의 고난도 협동플레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PC들이 볏단 쓰러지듯 죽어나가니, 게임이 너무 쉽다거나 루즈하다거나 하는 감각은 별로 없다. 또한 핵앤 슬래시가 흔히 지향하는 체계적인 캐릭터 성장과 커스터마이징과도 거리가 있는데, 필드에 보이는 캐릭터가 많은 것을 고려한 까닭인지 스킬 FX도 화려하지 않다.
그렇기에 ROTMG의 개성은 단순한 도트 그래픽에서 연상되는, MMO와 핵앤슬래쉬가 열화 결합하는 과정에서 부산되는 여러 특징적인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개 장르 아키타입 중 하나의 완성도가 뛰어난 것이 장점인 게임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하튼 재미있는 장면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특정 서버의 넥서스(마을)의 한 구석에는 사람이 몰려, 아이템 교환을 위한 도떼기 시장을 형성한다. 이렇게 시장이 되는 서버는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종종 두서없이 다른 서버로 사람이 옮겨가, 가끔 두 개 서버에서 시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물론 암묵적으로 사람이 몰리는 서버가 있기는 하다.)
디아2에서는 룬이, POE에서는 오브가 커런시(교환용 재화)의 역할을 하듯, ROTMG에서는 스탯 상승 포션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그보다 상위 재화로 쓰이는 장비가 몇 개 있긴 하지만, 그건 건너뛰고, 일상적인 아이템 교환에 쓰이는 것은 포션이다. 이걸 모아서 더 귀한 포션이나 장비와 교환하곤 한다. 적당히 높은 난이도의 던전에서부터 드롭되는 이 포션은, 말 그대로 사용하면 캐릭터 스탯이 오르는 아이템이다. 물론 스탯 포션으로 올릴 수 있는 스탯에도 한계치가 있는데, 그만치 다 올려도 상위 던전엘 가면 캐릭터가 순식간에 픽 쓰러져 죽기 때문에, 이 포션의 수요는 늘 차고 넘친다.
막상 시장 가보면 값이 엿장수 맘대로
모르던 다른 사람의 캐릭터가 옆에서 퍼마데스하여 묘비를 남기는 것은, 달리 ROTMG에서밖에 보기 힘든 광경이다. 사람들은 묘비 앞을 지나며 조의를 표하기 위해 F를 입력하는데(채팅창에), 커뮤니티에 자리잡은 일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체험을 통해 모종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다른 게임에서의 유례를 떠올리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캐릭터의 성장 수준은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캐릭터가 죽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무리 잘 키운 캐릭터라고 해도 예외가 없고, 그러므로 게임의 큰 구조는 캐릭터의 성장과 죽음의 반복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펫을 키울수도 있지만, 이건 부차적인 요소다. 기타 세부사항은 위에서 얘기한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개성적인 컨셉의 MMO겸 핵앤슬래시다.
DECA에서 게임을 인수한 후의 변화에 대해 말해보자. 이전에는 플래시였고, 지금은 유니티인데, 포팅 전후 이 게임의 마감 수준은 천양지차를 보인다. 그야말로 "비로소, 게임"이다. 게임의 편의성과 접근성에 관한 개별 개선사항은 차마 일일히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데, 돌이켜보면 당연히 있었어야 하는 것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상술하듯 핵도 잡혔고, 게임의 성능도 크게 향상됐다. "이른바, 게임"이다.
쌀먹은 힘들긴 하다
또한 업데이트 역시 활발한데, 원래 있던 요소들의 개선을 위시한 수평적인 업데이트 외에도, 새로운 상위 던전이나 성장, 도전요소가 추가되는 속도가 이전과는 궤를 달리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아닌 3달 주기 가량의 시즌 시스템과 시즌 임무, 그리고 시즌 임무의 달성 상태에 따른 보상 보드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여타 핵앤슬래쉬의 시즌이라고 하면 상상하기 쉽지만, ROTMG의 시즌은 또 특이한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시즌 캐릭터와 비-시즌 캐릭터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두 캐릭터의 다른 점은, 단지 두 캐릭터 카테고리간의 아이템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점 외에는 없다. 즉, 같은 필드에서 적을 잡고, 퍼마-데스인 것도 같고, 심지어 버프도 같이 받는데, 서로 거래만 못 할 뿐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면, 시즌 캐릭터끼리, 비-시즌 캐릭터끼리는 교환이 된다.
그러므로, 사실 시즌 캐릭터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시즌 전용 창고가 생기긴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딱 이정도 차이다. 게임이 애초에 일괄 하드코어이기 때문에, 시즌 캐릭터가 죽는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고 그냥 똑같이 사라질 뿐이다. '시즌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키운다'고 여겨본들, 일주일이면 맨땅에서부터 성장 캡까지 키울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즌 임무-시즌 보드다. 처음 접하면 일견 단순해보인다. 시즌 보드라는 것은 자질구레한 임무와, 그 보상이 적힌 노드가 트리를 이루는 UI 페이지를 뜻한다. 다시 봐도 단순하다. 그런데 중요한 이유는, 이 보드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다음엔 어떤 던전엘 들어가서 노략질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엔딩이 없는 MMO라면 응당 어딘가에서는 퀘스트나 로어의 형태로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렐름 오브 더 매드 갓에는 그러한 짜임새가 없었다. 이처럼 목적이 불분명한 채 방치된 신규 플레이어는, 이윽고 이탈하기 마련인데, 새로 도입된 시즌 임무가 일종의 초심자 예인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뉴비 발목잡기를 위한 전시행정이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시즌 보상은 그 자체로도 꽤 파격적이다. 현금으로 파는 것들도 뿌린다. 부자도 길가에 떨어진 만원은 줍는다고 하듯, 어지간히 게임을 한 사람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 계속 이어진다.
퀘스트만 다 깨도 부자 될 수 있다. 안 죽고 깨면의 말이지만..
이렇게 게임에 내부적인 가이드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주기적이고 알찬 업데이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달리 이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다. 다만 달리기 시작한 이상 언젠간 멈춰야 할 때도 다가오니, 업데이트가 되는둥 마는둥 그냥 깜깜하기만 하던 플래시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이미 수직적인 업데이트 주기가 가시화되어, 여기에 사람들이 호응하며 활성화된 이상, ROTMG는 헤엄치기를 멈추면 죽는 상어같은 존재가 되었다. 발을 잘 못 디뎌도 죽는다. 즉, 새로 잘 해놓은 바람에 기대치가 올라가 버렸다. 비로소, 진정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이 된 셈이다. 경영적인 면에서 봐도, 이전보다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아마도. 데카는 이 10년 된 게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긴 하지만, 게임 자체는 꽤 재미있어졌다. 혹여 기회를 놓치기 전에 한 번 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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