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4. 5. 23. 21:12

 

 어떻게 게임 이름이 빼앗긴 왕국? 좀 촌스럽다. 라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별 생각 안 든다. 오히려 직관적이라 좋지 않나? 하지만 뭔가... 투박해 보인다. 폰트도 그렇고. 마치 게임의 부족한 마감, QOL, UX를 예고하는 듯하다. 게임의 줄임말은 또 마음에 든다. '빼왕'... 뭔가 친근한 느낌?

 

 이 빼왕이라는 게임, 개발사는 burst2flame이라는 곳이다. 미국 쪽 기업인 것 같고, 매체에 드러나는 이력은 거의 없다. 빼앗긴 왕국 이전에, armored evolution이라는 탑다운 슈팅 게임을 하나 냈는데, 이 기업 명의의 다른 게임은 더 없는 듯. 21년에 4 Player Tactical Turn Based RPG이라는 부제로 킥스타터 페이지를 개설했는데, 이게 빼앗긴 왕국이다. 

 

 빼앗긴 왕국은 스토리가 거세된 RPG다. 사람의 꼬리뼈처럼 남아는 있기에, 흔적기관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대신 발달한 것은 폭넓은 스킬 트리와 다양한 아이템의 조합에서 나오는 캐릭터 빌드. 이 디자인은 빼앗긴 왕국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인 동시에 제약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폐지 줍는 RPG같지만,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턴제 전투라는 요소.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멀티 플레이어 코-옵이 된다는 점, 혹은 한 명이 여러 캐릭터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 즉, 빼앗긴 왕국은 턴제 디아블로 비슷한 게임이다.

 

 제시되는 게임 모드는 캠페인과 로그라이크의 두 가지다. 로그라이크는 캠페인 디자인의 일부가 차용된 곁다리이므로, 부차적이다. 무게중심이 되는 것은 캠페인의 쪽. 캠페인은 1-6개 까지의 캐릭터를 만들어 시작하게 된다. 캐릭터는 중간에 빼거나 넣을 수 있는데, 캠페인 진행 중 등장하는 고유 캐릭터같은 것은 없다. 거세됐으므로. 캐릭터의 수에 따라 게임의 난이도가 스케일링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등장하는 적의 수와 스펙이 달라진다. 이와 별개의 난이도 조절이 하나 더 있다. 1에서 6단계까지 있고, 여기서는 단순히 몹의 스펙만 달라진다.

 

이걸 왜 처음부터 다 열어놨는지 모르겠다.

 

 캠페인은 스토리를 따라 월드맵의 특정 노드를 하나하나 눌러 클리어하는 것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 게임의 스토리는 전자레인지 구입 시 딸려오는 조리법 책자 정도의 역할에 불과하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월드 맵의 노드 진입 시, 몇 번의 전투와 이벤트로 이루어진,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보스전이 있는 임시 맵이 생성되며, 전투에서 이기면 아이템과 골드, 경험치가 들어온다. 월드 맵에는 전투 노드 외에도 마을 노드가 있어, 누르면 마을에 들어가 아이템을 사고 팔 수 있다. NPC와의 대화나 퀘스트같은 것은 없다.

 

 캠페인의 캐릭터는 레벨 1로 시작하며, 30까지 올릴 수 있다. 1레벨에 3개 스킬로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32점의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다. 여러 계통의 스킬 세트가 있으며, 서로 다른 계통의 스킬에 교차 투자하는 것에 대한 제한은 따로 없다. 다만 각 계통의 상위 스킬들은 그 자체로 2, 3점의 포인트를 요구하며, 해당 계통의 하위 스킬들에 일정 포인트 이상이 미리 투자되어 있어야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빌드를 짜 보면 체감이 상당히 빡빡하다.

 

포인트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스킬들이 생기게 된다.

 

 캐릭터 레벨이 오를 때마다 스탯 포인트를 5씩 받는다. 스탯의 명칭 자체는 전형적. 힘, 민첩, 활력, 지능, 반사신경의 5가지. 근데 작용은 좀 다르다. 대표적으로는 힘을 찍으면 물리 공격력과 동시에 주문 공격력도 같이 오른다. 지능은 MP 최대치만 올려준다. 때문에 마법사 캐릭터들도 힘을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힘" 스탯의 원문명이 Strength가 아니라 Might인 모양. 덕분에 물리 스킬과 마법 스킬의 병용이 어느정도 성립한다.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이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캐릭터를 빌드하는 과정에서 고민함에 있다. 스탯과 스킬의 리셋이 간편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조합을 시험해보는 행위. 한정된 레고를 여러 방법으로 조립해보는 듯한. 하지만 이런 즐거움은 좀 나중에나 가서야 느낄 수 있다.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애초 어떤 스킬, 어떤 아이템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스킬이야 마우스 올려보면 알 수 있다지만, 어떤 아이템이 있는지는 주워보기 전까지 모른다. 그리고 보통은 특정 아이템이 캐릭터 빌드의 핵심이 된다. 결국 플레이어는 학습이 필요하다.

 

일례로, 이 뇌법 세팅의 경우 '지능의 20%에 해당하는 추가 번개 데미지'가 빌드의 핵심이 된다.

 

 근데 캠페인의 초반 QOL이 별로라, 재미있어지는 시점까지 진행하는 것이 괴롭다. 단순히 얘기하자면, 게임이 너무 처음부터 홀딱 벗고 있다. 우선 난이도 세팅의 경우, 이건 캠페인 시작 전에도 정할 수 있고 도중에도 바꿀 수 있지만, 최저 난이도부터 최고 난이도까지가 기본적으로 전부 열려 있다. 그런데 최고 난이도로 시작할 경우, 진행이 불가능하다. 캐릭터 레벨이 좀 높아지고, 플레이어가 게임에 이해도가 생긴 뒤에야 고난이도 플레이가 가능한데, 2회차를 해도 힘들 것 같은 난이도를 덜컥 열어놨으니 불합리한 패배에 직면하는 것은 순식간. 안전장치가 없다. 고민을 안 한 것 같다.

 

 몹에는 여러가지 랜덤 모디파이어가 붙는데, 1렙에 붙는 모디파이어나 30렙에 붙는 모디파이어나 달라지는 게 없다. 체감은 그렇다. 처음엔 쏟아지다시피하는 다양한 모디파이어에 피곤하고, 나중엔 새로 나오는게 없으니 지루하다. 몹의 레벨이 높아져도 스탯만 오르고, 난이도가 높아져도 스탯만 오른다. 적의 레벨은 항상 내 레벨에 맞춰 스케일링되기 때문에, 캐릭터 빌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할 경우, 점점 가파르게 오르는 적의 스탯에 밀려, 갈수록 내 캐릭터들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에도 역시 튜토리얼 따위의 안전장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난이도 면에서, 게임의 균형 자체는 어느정도 잡혀 있다. 물론 게임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갖추어진 경우에 한한다. 어떤 스킬이 좋은지,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구성해야 하는지 대강 알게 된 경우. 말하자면 빼앗긴 왕국은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갈수록 늘어가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 게임의 난이도 조정이라는 것을 단순히 적 스탯의 높고 낮음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하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체감 난이도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결국엔 나름의 균형이 맞춰진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대강의 표를 그려보면 이렇다. 처음부터 제시되는, 열려있는 시스템이 많아,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비해, 사람이 흡수할 수 있는 정보량엔 한계가 있어, 피로를 느낄 수 있다. 혹은 이해가 더디게 된다.

 

 

 한편 게임에서 평가받게 되는 진행능력의 기준치는 설정한 난이도에 따라 몹의 스탯에 정비례하여 올라가는데, 게임 도중에 마땅히 제시되는 상황, 튜토리얼 따위가 없어 학습의 기회를 놓치기 쉽다. 더군다나 몹의 레벨이 항상 스케일링되기 때문에, 레벨 노가다로 극복도 불가능. 이런 상황 자체는 전에 리뷰했던 페이 택틱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빼앗긴 왕국에서의 선택지가 조금 더 많다는 점이겠다. 플레이어의 스펙이 밀리는 상황이 분명 발생하기는 하는데, 빌드 리셋이 저렴해 몇 번 테스트하다보면 어쨌건 극복이 가능한 터라... 달리 말하면 이점을 따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QOL이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나름의 뽕맛은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30레벨이 만렙이며, 그 이상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는 없다. 다만 그 이후로는 무한 모드가 있어서, 무한정 단수를 올릴 수 있는데, 솔직히 파고들기 요소로서는 그냥저냥인 것 같다. 새로운 아이템이 추가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30레벨 정도까지는 난이도 불문하고 여러 캐릭터 빌드가 통용되는데, 그 이후로는 빌드의 허들이 높다. 점차 빌드 다양성이 수렴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부터는 게임의 사족이 아닌가 싶다.

 

 이것저것 잘라내고 캐릭터 성장만 남긴 RPG인 이 게임, 담백한 것이 장점이긴 하지만, 넣으려다가 포기한 요소들도 이래저래 있는 것 같다. 오래된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나 개발사의 웹사이트에서 게임을 소개하는 바로는, 마을이나 나라의 운영, 건물을 건설하는 등의 요소가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 정식 발매한 게임에서는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얼리 엑세스가 원래 그런 거라고는 하지만, 디자인이 휘청였던 것처럼 보인다.

 

 스킬의 디자인 자체는 꽤 잘 된 편이라고 생각한다. 총 10개의 스킬 계통이 있는데, 하나에 올인하는 것보다는 시너지가 있는 여러 종류를 섞는 것이 명백히 더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빛과 수도사 계통은 스탯 관련 보너스에 연관이 있고, 그림자와 자연은 소환 관련 시너지가 있다. 도둑과 레인저, 번개는 크리티컬을 공유, 도둑과 그림자는 독 관련을 또 공유, 등. 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언급했던 다른 게임 모드인 로그라이크, 이건 랜덤으로 나오는 스킬을 픽해가며 계속 전투하는 모드인데, 캠페인 리소스를 잘 재활용했다는 인상은 있지만 독립 컨텐츠로서는 애매하다. 한 번 해보고 마는 모드.

 

 멀티플레이 지원이 꽤 잘 되어 있긴 한데, 그 마감이 꼼꼼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멀티로 하면 재미야 있다만. 수십시간 분량의 캠페인을 진득히 모여서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애초 노가다가 전제된 폐지 줍는 게임을 멀티에서 어떻게 작동시키려던 것인지... 기대 이상의 게임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