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4. 12. 2. 22:50

자신이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던전 크롤 스톤 수프, 통칭 돌죽. 오래된 로그라이크. 게임의 원형이 되는 던전 크롤의 최초 릴리스는 95년이고, 이를 계승한 스톤 수프가 2006년부터 개발중이다. 개발중이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업데이트가 진행중이라는 뜻이다. 최신 업데이트는 올해 11월. 전부터 건드려볼 생각은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두었다가, 이번 가을에 실질적으로 입문했다.

 

 "이런저런 이유들" 중 선두에 있는 것은 게임의 접근성이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게임의 원본은 아스키 그래픽인데, 이건 손댈 엄두도 안 난다. 웹 버전의 스톤수프에 와서 게임이 타일 그래픽으로 전환되었다. 기반이 오래되었기에 GUI가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게임의 조작 태반은 단축키로 수행해야만 하는데, 필요한 단축키를 찾아보는 것이 어지간히도 번거롭다. 장벽을 넘고 나서야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스톤수프는 턴제 타일베이스 던전 크롤링 게임이다. 게임의 핵심은 능숙하게 전투하는 것이다. 설정상의 목표는 던전의 심층부에 보관된 보물 "조트의 오브"를 수거하는 것이다. 던전 안에 떨어진 여러가지 도구를 효율적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해 던전을 공략하는 게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게임을 짬짬히, 두어달 정도 해 본 뒤에야, DCSS가 어떤 게임인지, 내가 받은 인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여유시간에 했다지만 두어달이나 걸린 이유는, 게임이 마냥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DCSS는 소위 "깊이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깊이있는게임' 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정확한 어휘라는 생각이 든다. 고로 그냥 "복잡한" 게임이라고 부를 요량이다. DCSS는 복잡한 게임이었다.

 

시스템을 전부 알아야만 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를 묻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DCSS가 복잡한 이유는,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요소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문명6가 연상되는 대목. 분명히 하기 위해, 게임에 포함된 정보가 많은 것과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필요한 이른바 "유효 정보"가 많은 것은 별개다. 마인크래프트를 하면서 자갈에서 부싯돌이 나올 확률이며 잡초를 부쉈을 때 밀 씨앗이 나올 확률이며를 다 외우고 다닐 필요야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몇 칸을 낙하해야 데미지가 들어오느냐, 네더에서 침대를 사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 하는 것들은, 알아두면 편리하다. 스톤수프의 경우, 후자에 해당하는 정보가 뒤지게 많다. 또한 치명적이다.

 

 세부 디자인 요소들에 대한 감상을 먼저 늘어놓을 것이고, 글의 마지막에서 맺을 것이다. 우선 DCSS에서 조작하게 되는 캐릭터, 캐릭터는 개별적인 개성을 지닌다기보다는, 고른 종족의 특성만을 따른다. 종족의 운영 복잡성에 따라 초급, 중급, 고급의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난 그냥 쉬움, 어려움, 거지같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종족을 고른 뒤에는 직업을 고른다. 직업은 시작 스탯과 소지 아이템 등에 관여하며, 이후 캐릭터의 육성 방향은 고른 직업에 구속되지 않는다. 마음대로 키워도 상관 없다. 고른 종족의 특성은 천차만별이며, 그 카테고리는 종족 돌연변이, 스탯, 기술 적성으로 대강 나눌 수 있다.

 

기술 적성, 이것은 캐릭터가 게임 내에서 수행하는 여러가지 동작을 얼마나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느냐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다른 게임의 마스터리, 혹은 패시브 스킬 등으로 흔히 나타낼 수 있다. 전투술, 도끼 적성, 검 적성, 화염마법 적성, 기도술 등의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으며, 전투 등에서 획득하는 경험치를 플레이어 임의로 배분하여 적성을 올릴 수 있다. 어떠한 적성에 얼만큼 투자하여 효율적으로 이득을 보느냐 하는 것이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능숙함이다. 종족마다 기술 적성의 가산치가 다르다. 따라서 고르는 종족에 따라 효율적인 육성 방향이 어느정도 명확한데, 이 길 위를 벗어나면 괴로움을 자처하는 꼴이다.

 

종족에 적합한 육성 방향에 대해 시작부터 표시해주고 있다.

 

 던전 크롤은 턴제 전투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따라서 전투는 나한번 너한번이다(보통은). 던전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은 대개 들고 있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고, 턴을 소모해 사용해야만 한다. 턴이 소모된다는 점은 무기 공격, 마법 사용, 이동 등의 행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말하고자 하는 점은, 이렇게 누를 수 있는 버튼이 많다고 해서 캐릭터가 강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버튼을 누를 때에는 많든 적든 턴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누를 수 있는 각 버튼의 효용을 결정하는 것은, 즉 기술 적성이다. 던전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은 매 판마다 랜덤이지만, 어느 적성에 투자할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이다. 

 

 여기서 불만스러운 점 하나. 캐릭터의 육성 방향에 따라 눌러야 할 버튼의 수와 접근성이 천차만별이다. 근접 무기로 공격하는 전사의 경우 공격 버튼만 누르다가 때때로 보조 스킬을 한번씩 써 주면 땡인데, 마법사의 경우 상황마다 사용해야 하는 마법이 대개 다르다. 그것 자체는 흥미로운 요소지만, 매번 다른 마법을 골라 사용하는 것이 좀 번거롭다. 퀵으로 등록해둔 스펠이 아니라면, 스펠북을 열어서 주문을 골라야 하는데, 이는 이른바 핫바의 GUI가 구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번거로움이다. 핫바 비슷한게 있기는 한데, 핫바는 아니다. 아무튼 번거롭다.

 

일부 액티브 요소에 대해 빠른 접근이 가능하게끔 구현되어 있으나

 

 던전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던전은 여러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층의 구조는 평면적이다. 전체 층이 몇 개가 되느냐 하는 것은 매 게임마다 똑같은데, 각 층의 레이아웃은 매번 다르다. 즉, 구성은 똑같은데 세부적인 부분이 다르다. 좀 크게 다를 때도 있긴 한데, 대개 캐릭터가 살고 죽는 문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각 층은 3개의 왕복 계단과 1개의 일방 통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던전의 곳곳에는 서브 던전으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있다. 서브 던전은 저마다 지형 특성과 등장 몹들이 다르다. 서브 던전의 마지막 층에는 대체로 룬이라는 특수 아이템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트의 오브"를 회수하여 지상으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3개 이상의 룬을 획득해야 한다.

 

 던전의 구성에 대해, 그리고 위험성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게임의 클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 두어도 과언이 아니다. 그냥 모르면 죽는다. 서브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고, 당장 있는 곳과 비슷한 난이도의 장소겠거니 하고 냉큼 들어가버리면 다음 장 확정이다. 이 게임은 이렇듯 다양한 요소에 있어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들다.

 

 심지어 게임의 여러 요소들, 던전의 구조, 조우한 몬스터의 특성과 약점 등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흐름을 예상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DCSS는 정말 많은 요소들에 대해 다이스를 굴린다. 데미지, 방어력, 무언가의 지속시간 등... 어떠한 공격에 대한 데미지를 계산할 때, 1d표기 데미지 - 1d방어력만큼의 데미지가 들어온다. 실제 계산은 더 복잡하지만, 개념은 이렇다. 운이 좋고 나쁨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결과의 차이가 극단적이다. 포션을 마셨을 때의 치유량, 효과의 지속시간, 플레이어의 여러 행동들로 발생하는 결과의 편차가 크다. 따라서 내 행동의 결과를 함부로 예측할 수 없으며, 유일하다시피 확정적인 것은 각 속성 저항에서 보장하는 피해량의 고정 감소율 뿐이다...

 

 그러나 돌죽에는 플레이어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만회의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다. 이른바 구원 수단들... 위기 상황은 플레이어의 잘못된 판단으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돌죽의 악의적인 함정들이나 상태 이상에 대해서는 설명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단지 모르면 죽어야지의 연장일 뿐이다. 채찍에는 당근이 이어져야 할텐데, 채찍 자체가 포상이라는 듯이... 가죽 클럽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여튼간에 위험 상황을 확정적으로 모면하게 해주는 아이템, 기회가 극히 적거나 제한적이다. 혹은 그 효과가 미묘하다. 융통성이 없다. 

 

체력을 채워준다지만, 얼마나 채워주는지는 비밀이다. 

 

 게임의 계산 방식이나 여타 정보들과 마찬가지로, 돌죽의 여러가지 마법들 역시 그 효과를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스펠에는 대강의 설명이 동봉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부족한 경우도 많다. 효율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간 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게임에 대해 잘 모를 경우, 빠르게 반복해서 죽어가며 게임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매 판 조금씩 상황이 달라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사실 돌죽은, 플레이어가 이해, 혹은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죽음을 제공한다. 굴러가는 다이스는 극과 극이지만 시스템 자체는 퍽 합리적인 구석이 많다. 이를테면, 플레이어의 시야 안에 있는 적만 플레이어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 행위를 하고, 시야 밖에 있는 적은 공격하지 않는다. 어이없이 죽는 상황에서도, 돌이켜보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자체는 있었던 경우가 많다. 귀찮아서 그렇지.

 

 자주 죽게되니 게임이 짜증은 나지만, 다음 판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기대하게 된다. 다음엔 좋은 템이 뜨겠지, 스펠이 뜨겠지 하는... 그러한 까닭은 결국 게임이 어느정도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국 육성 방향에 따라 어느정도 수렴한다는 감상은 있긴 한데, 그만치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정보의 절대적인 양 자체는 문명6보다 적기 때문에,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깨놓고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나저러나 옛날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