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0. 2. 18. 00:15

최초작성: 2019. 3. 11. 3:58

우리네 인생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

세상 만사가 마치 뜬 구름과 같구나

묻힌 흙 모은 뒤에 장례손님 모두 떠나면

쓸쓸한 산 위에 황혼달만 처량히 비치는구나

 요즘 폐지 가격을 찾아 봤습니다. 키로당 60~70원쯤 한다고 합니다. 턱없이 적습니다. 폐지 주우시는 분들은 고철이나 다른 것들도 모으시겠지만, 노령연금이나 국민연금 받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노동력 대비 수익이 좋은 업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폐지 중에 복권, 집문서, 채권 따위가 같이 드랍된다면? 주울 맛 나지 않겠습니까? 제정신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그런 걸 흘리는 사람은 없겠지만,(사실 주워도 문제지만) 보물찾기에는 역시 로망이 있습니다. 그 있지 않습니까? 미국 같은 땅 덩어리 넓은 나라에선 금속 탐지기 같은 걸로 땅을 비비고 다닙니다. 나름의 취미 생활로서 인정받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다니다가 2차 대전 당시 총이나 더 값진 물건들을 주웠다는 소식이 인터넷 기사로 종종 올라오긴 합니다. 디아블로 2가 그래서 미국에서 만들어졌나 봅니다.

 

 우리는(적어도 저는) 이렇게 아이템을 줍는 것이 주 컨텐츠인 게임들을 폐지류라고 부릅니다. 이런 폐지류 게임에는 준 필수적으로 하드코어 모드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인생은 한 번 뿐이기에 일확천금의 기회가 필요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폐지류 게임을 어떤 사람들은 클라이머, 디아블로류 게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폐지류 게임들은 별로 많이 출시되지 않았습니다. 디아블로2,3, POE, 워프레임, 디비전, 한글화로 화제를 모았던 데스티니2, 최근에 좆망한 앤썸같은 타이틀들이 있는데, 제가 몇주간 박았던 게임은 렐름갓입니다.

 렐름갓은 12년에 카밤에서 런칭한 폐지MMO 게임입니다. 플래쉬 기반의 게임이고(유니티로 갈아타고 있다.-20), 보안이 취약한지 핵이나 봇 따위가 판을 칩니다. 개발사는 딱히 잡을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인게임 아이템이나 계정을 돈 받고 파는 불법 사이트들도 많고 광고도 많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3~4000명대의 동접자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퍼마 데스라서 한 번 죽으면 들고 있던 템이 다 날아가는 것은 예사고 플레이 의지마저 훅 날아갑니다. 성욕 날아가고 현탐 오는것과 비슷합니다. 죽으면 페임이 남는데, 용처가 별로 없습니다. 펫 관련해서 이것저것 할 수 있습니다. 밥값으로 내던가 합치는데 쓰던가 하는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다른 쓸 곳도 없으므로 걍 박으면 되긴 합니다. 그걸 빼면 페임은 그냥 점수의 개념입니다. 몹을 잡을때마다 경험치 대신 올라가는데, 뭐 별 건 없습니다. 높을 때 죽으면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것 정도.

 

나는 그것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게임에서는 스탯 포션이 화폐의 역할을 합니다. 중상위권 몹들을 잡으면 종종 스탯 포션을 드랍하는데, 클래스별로 상한선까지 스탯을 올리는게 졸업 스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hp, mp. atk,def,spd,dex,wis,vit까지 해서 8개의 스텟을 맥스로 찍은 캐릭터를 8/8이라고 부릅니다. 고인물 필수과정입니다. 이 뒤로는 무한 파밍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렐름갓의 포션 시세는 항상 요동칩니다. 이벤트나 업데이트 때문에 특정 스탯을 올려주는 포션의 전체적인 수급률에 변화가 있었을 경우, 시장 시세에 즉각 반영됩니다. 8개 스텟 포션의 가치에는 상대적인 상하관계가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적들에게서나 드랍되는 life 포션의 경우, 방어력 포션의 5배, 이동속도 포션의 약 8배 값어치를 합니다. 대부분의 장비 아이템들은 이 포션들로 거래합니다. 유별나게 비싼 스킨이나 한정 드롭 장비같은 것들은 더 높은 가치의 아이템으로 거래합니다. 아무튼 렐름의 시장은 활성화되어 있어서 보기 좋습니다.

 

속고 속이는 것이 시장이란 말이다!

 

 렐름갓의 폐지는 정량 폐지입니다. 옵션이 다이나믹해 같은 폐지라도 가격차가 나고는 하는 여타 게임들과는 달리, 모든 아이템의 옵션이 고정입니다. 가볍다는 뜻입니다. 드랍률을 뚫고 옵션도 뚫고 이중고를 겪지 않고 드랍률만 뚫으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유니크 아이템들이 계정 귀속입니다. 따라서 정량 옵션의 아이템들이 공장식으로 뽑혀나와서 싸게싸게 팔리는 광경을 볼 수는 없습니다. 대신 최상위권 유저들끼리의 시장이 닫혀 버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핵을 못 잡은 개발사의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MMO로그라이크라는 특성으로 인해 재미있는 광경을 몇몇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묘비가 세워집니다. 캐릭터의 생전 스탯 상태에 따라 묘비가 점점 커집니다. 만렙 20렙을 찍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하면 똥색 묘비가, 20렙을 찍으면 회색 돌묘비가 세워집니다. 8/8 묘비는 굉장히 커서, 채팅창에 다른 캐릭터가 사망했다는 알림이 뜨면 묫자리를 방문해 조의(f)를 표하는 유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은 던전은 아예 체계적으로 클래스 역할군을 조합해서 들어가는 곳도 있습니다. mmo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oe나 디아블로에서는 상상하기 조금 어려운 모습입니다. 다만 mmo이기 때문에 유저 개인은 조금 덜 화려합니다. 주변에 망치 둥둥둥 떠 다니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수한 추모 요청..!

 

 게임의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한 몇 가지 장치가 있습니다. tp랑 넥서스 핫키가 그 예시인데, 플레이어가 지정한 핫키를 누르면 마을 역할의 넥서스로 바로 돌아갑니다. 주변의 탄막이 위협적인 경우, hp가 간당간당한 경우, 그냥 넥서스에 가야하는 경우, 필드에서든 인던에서든 바로 넥서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드의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tp할 수 있습니다. 이 기능을 이용해 인스턴스 던전의 입구가 출현했을 때, 공략할 사람을 모으기 위해 tp타서 오라고 부르는 유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렐름갓은 스토리 요소가 아예 배제되어 있습니다. 아주아주아주 기본적인 설정은 있습니다. 이세계 신이 침공!? 한다는 스토리가 있기는 한데, 그 신이 허구헌날 유저들한테 골수까지 빨려먹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없다고 보면 됩니다.

 

 스토리 요소가 부재한다는 것은, 렐름갓이 유저에게 어필할만한 요소 하나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게임의 자체 플레이만으로 유저를 잡아야 하는데, 나름 성공적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활동적인 유저 시장, 눈에 띄는 인플레이션 없음. 하지만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이템이 고정 스펙이라 폐지마다 새로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가 굉장히 적습니다. 스킬트리같은 것은 당연히도 없고, 스킨도 아래위로 한세트 염색 뿐이라 빠르게 질리는 편입니다. 최고스펙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닙니다. 이틀정도 하면 대부분 스텟은 맥스를 찍습니다.

 

본인이 쓰지 않는 장비를 처분하는 것이 곤란합니다. 티어가 높은 장비는 수요가 있으므로 팔면 되고, 실용성이 없는 저티어 장비는 길바닥에 버려두면 되는데, 퀄리티가 어중간하게 높은 장비가 애매합니다. F2P에 부분유료화라 기본 창고가 굉장히 좁습니다. 드롭에서 수요가 있는 장비가 뜨지 않으면 소득이 아예 0이라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 맛에 합니다. T9짜리 폐지들은 쓰레기일 뿐

 

 렐름의 폐지는 도트입니다. 8*8에서는 누가 찍든 잘잘못이 티가 안 나기 때문에 8*8짜리 도트 폐지가 수집욕을 자극합니다. 너무 이쁩니다. 16*16이었으면 fft퀄리티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상 애매했을 텐데, 오히려 더 저해상도라는 점이 매력을 살렸습니다. 메이플 따조를 모으는 기분입니다. 창고 크기가 널널했으면 온갖 잡폐지를 다 모았을 겁니다.

 

워후! 고타 겟뎀 올!

 

 암튼 예전엔 카페 길드까지 만들고 여러 명이서 했었던 게임인데, 지금은 저나 몇 년에 한 번씩 켜서 해보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플레이 자체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룩이나 새로운 장비는 꾸준히 추가되는 모양입니다. 몇 주씩 할 만한 게임은 못 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창고와 인벤토리가 굉장히 좁습니다. 인벤토리 8칸에 창고 8칸인데, 8칸짜리 추가 창고가 5000원인가 합니다. 몇만원씩 주고 할 만한 게임인가 하면, 글쎄요. 가볍게 합시다. 가볍게. 엔딩이 없는 게임이기에 저마다의 엔딩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마침내 소유욕을 버렸던 것이 제 렐름의 끝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시발

 

 개발사는 최근 렐름갓을 유니티에 이식해 새로운 10년을 준비한다고 밝혔는데, 단순 편의성 강화인지 확장팩 느낌인지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개발 자체는 순조로운 듯.-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