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jogaq 2020. 4. 7. 06:39

사냥개의 성욕을 잠시간 크게 강화시킵니다.

 결국 첫인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일례로는 다키스트 던전이 그렇다. 이 게임을 처음 접했던 것은 벌써 5년 전으로, 당시 다키스트 던전은 얼리 엑세스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키스트 던전을 내게 소개해 주었을 때, 나는 시큰둥했다. 흔한 로그라이트가 아닌가? 한창 아이작 리버스니 뭐니 하면서 "인디 로그라이크" 붐이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딱히 내가 직접 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걸 230시간이나 돌리게 될 줄은 그 때만 해도, 게임을 살 적에도, 꿈에도 몰랐다. 그 시절에는 다음 TV팟을 자주 봤는데, 평소 보던 PD가 해당 게임을 송출하는 중이었다. 안면은 있던 게임이니 어떤 게임인지나 좀 보려는 심산으로 방송을 들어갔었는데, 결국 게임을 사버렸다.

 구매 결정은 참 빨랐지만 클리어는 5년이나 걸렸다. 원인을 따져보면 다른 이유보다는 그냥 귀찮아서가 크다. 돌이켜보면 참 질리는 게임이다. 다키스트 던전은 로그라이트보다는 rpg라는 장르명이 더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아래 적는다.

 다키스트 던전은 개발사 레드훅에서 14년 초 킥스타터로 후원자를 모집하고, 15년 경 얼리엑세스 시작, 16년 초 출시한 던전 rpg이다. 이후 3개의 DLC를 출시하고, 얼마 전 신규 DLC 출시까지 예고하는 등, 나름 자리를 잘 잡은 모양이다. 후속작 다키스트 던전 2의 티저도 만들어둔 것을 보면, 개발사는 해당 타이틀을 길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나오는 DLC는 온라인 PVP랜다. 하스스톤보다 더하지 않나 싶다.

 다키스트 던전은 그때까지 나왔던 여러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면모가 몇몇 있었다. 우선 퍼마 데스로 직결되는 턴제 전투를 채용하는 사례 자체가 꽤 드물었다. 그런 시스템은 보통 본격 하드코어 SRPG또는 로그라이크에나 등장하는데, 한창 드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액션 로그라이크(내지 로그라이트)는 퍼마 데스는 있어도 턴제와는 거리가 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7년 말에 출시되어 다키스트 던전처럼 인기를 누리며 그 아류작이 시장에 폭력적으로 방생되고 있는 슬레이 더 스파이어가, 한국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초반기엔 다키스톤(다키스트 던전+하스스톤)이라고 잠시 불렸었던 것을 셈에 넣으면, 다키스트 던전이 당시 게이머들의 머릿속에 어떤 초상을 남겼는지는 명확하다.)

 게임은 이렇게 시작한다. 해안가의 변두리 영지를 배경으로 하는데, 근처 해안가 절벽엔 영주의 저택이 있다. 이 저택은 과거 세대에 쇠락하여,지금에 와서는 사이비의 터전, 형태가 뒤틀린 온갖 괴수들이 노니는 던전이 되어버린다. 플레이어는 영주 가문의 후손인데, 죽은 선대 가주가 보낸 편지를 받고 가문의 옛 땅으로 되돌아온다. 플레이어는 이제 황량해진 영지를 개보수하고, 한가한 용병들을 모집해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

힐러 둘 타세요. 부릉~

 용병들은 역마차에 올라타 영지까지 다다른다. 이들 중 적절한 인물을 골라 숙소 한계치까지 고용할 수 있다. 용병들은 총 17가지 종류의 병종으로 나뉘는데, 특출나게 무능하거나 유능한 병종은 없다시피하다. 이들은 각각 0레벨에서 시작해 6레벨까지 강해질 수 있다. 오르는 레벨에 따라 스킬을 강화하거나, 장비를 강화할 수 있다. 만렙을 찍은 이후 선형적인 방법으로 캐릭터를 더 강화할 수는 없다.

 게임의 핵심은 4명의 용병들로 파티를 만들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4개 지역으로 용병들을 보낼 수 있고, 스토리 엔딩을 위한 던전이 따로 있다. 지역마다 등장 적이나 오브젝트가 확연히 달라 용병 구성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전투다. 네 명의 용병이 줄지어 던전 안을 탐험한다. 마주치는 적들 역시 4개 슬롯의 진형을 이루고 덤벼든다. 용병들의 모든 공격은 사정거리와 사용 가능한 위치가 저마다 정해져 있다.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속도에 따라 턴을 주고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짭퉁게임에서 이 비슷한 화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대단히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전투 시스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캐릭터의 위치(전후열)에 기반한 전략성은 퍽 짜임새있긴 하지만 파고들만큼 깊진 않다. 턴제 전투에 익숙하다면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다키스트 던전의 전투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연출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퍼마 데스 때문이다.

 용병의 HP가 0이 되면, 기본 33%확률로 다음 공격에 사망하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격을 주고받을때 플레이어는 쉽게 긴장한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연출이니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키스트 던전의 퍼마 데스 패널티는 다른 의도보다는 긴장감 조성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게임엔 스트레스 시스템이 있다. 용병의 HP아래 깨진 글자처럼 □□□되어있는 막대가 그것인데, 제2의 HP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적에게는 없고 내 용병들에게만 적용되는 수치다. 던전을 돌아다니다보면 갖가지 방법으로 스트레스가 올라간다. 그러다 100을 넘기면 정신병이 와서 가끔 컨트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멀쩡히 잘 싸우는 아군한테 욕을 한다. 그래서 스트레스 200을 넘기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투 시스템의 깊이보다는 연출에 기여하는 것이 크다.

 다키스트 던전의 전투는 반복하다보면 점점 싱거워진다. 캐릭터 레벨에 따라 던전의 난이도가 점점 오르기는 한다. 각 지역마다 새로운 강력한 적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던전마다의 의외성은 플레이어의 경험 습득에 따라 소모되기만 하고, 최종 잔존량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 자체가 던전 탐험밖에 없는 게임 특성상 진행 후반부가 지루한 편이고, 로그라이트라고 부르기 힘들다.

 최선의 전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반복적인 플레이는 RNG에 크게 의존한 게임 전투 시스템과 좋은 짝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플레이타임 230시간의 원인이다. 또 짜증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난이도 조절이 잘 된 게임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의 선택을 했음이 명백한 상황에서, 데스도어 33%터져서 용병이 훅 죽어버린다던가, 적 보스가 2% 확률로 크리티컬 공격을 띄운다던가 하는 전개가 이어지면, 게임의 전략성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걸 돌리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막연한 조홍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달 안켰다가 세이브 날리고 새로 시작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뭐야 돌려줘요

 어쨌든간에, 다키스트 던전은 스토리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고, 전투에 집중한 JRPG라고 줄여 말해 볼 수 있다.(이런 걸 뜻하는 건 아니고) 파티가 4명이라는 점에서도 연상되는 것이 있고...(4인 구성이야 흔하긴 하지만서도) 구식 턴제 전투는 ATB와 CTB같은 개선판을 내놓곤 했는데, 다키스트 던전의 전투 또한 또 다른 재미있는 방향의 개선판인 셈이다.

 다키스트 던전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트웍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다. 다른 요소들보다도 게임의 분위기가 다키스트 던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스스로 제시한 방향성에서 엇나가는 그래픽 리소스가 없다. 호러틱한 기저에 맞춰 음영이 강조되어 있는데, 다키스트 던전의 아류작들이 놀랍게도 게임의 전투 시스템 뿐만 아니라 아트웍 방향성까지도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다키스트 던전의 아트는 많은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림 조금 다르게 그릴 창의성도 없는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다키스트 던전의 음영이 강조된 그림체도 사실 미국 고전 코믹스에서 따온 것들이고, 그러니 다키스트 던전 파쿠리 게임들이 이와 유사한 그래픽 방향성을 채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에 대해서 비난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크래프톤의 미스트오버 관련 정보글에서 많이 봤다.) 서양의 원로급 아티스트의 이름을 들먹이며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구나 싶긴 하다. 하지만 그걸 생각해야 한다. 다키스트 던전의 아트를 벤치마킹한 게임들은 보통 전투 연출도 베껴갔다.

놀랐습니다!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리소스 많이 안 쓰면서 이렇게 역동적일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1장에 효과 조금 넣었을 뿐이다. 공격시 화면이 살짝 틀어지면서 효과음도 날카롭게 치고들어온다. 가끔은 나레이션도 나온다. 크리티컬이라도 터지면 의자에 앉아 펄쩍 뛴다. 이것보다 잘 만들수 있겠다는 확신은 쉽게 안 나올 것이니, 대강 베껴가는 것도 이해가 된다. 베끼는 것도 잘 못하니 문제지만.

 소위 '스팀 게임'에 관심이 있다면 개인 방송을 통해서든 직접 해봤든 대강 알고는 있는 사람이 많다. 일종의 트렌드 리더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던 게임이니만큼, 관심이 있다면 손을 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스트오버와 다키스트 던전의 성취 사이의 간극은 결국, 그림체니 취향 문제니 하는 보잘것없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다키스트 던전 2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스럽다. 레드훅은 더 보여줄 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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